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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수원시,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본격 시동

[경기=아시아뉴스통신] 정은아기자 송고시간 2016-08-31 16:51

10월 세계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정조대왕 능행차

31일 학술대회 통해 재현의 역사적 의미 되새겨

최초로 수원-서울 전 구간 공동재현 예정
지난해 10월 9일 오후 수원화성문화제에서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의 능을 찾아가는 참배길을 재현한 정조대왕 능행차가 장안문, 행궁광장, 팔달문까지 정조로 구간에서 열렸다. 오는 10월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서울부터 수원까지 전구간 능행차가 공동재현된다.(사진제공=수원시청)

수원시가 정조대왕 능행차를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본격 시동을 걸었다.

시는 수원화성 축성 220년을 맞아 세계적 관광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올 한해를 수원화성 방문의 해로 정하고 700만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온 힘을 다하고 있다.

10월에는 수원화성문화제와 함께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사로 세계 관광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또 다른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31일 정조대왕 능행차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오는 10월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의 의미를 되새겼다.

시는 이날 라마다 프라자 수원호텔 대연회장에서 역사, 문화, 관광 등 분야 전문가와 관련 학회 회원, 지역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 내빈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우리 시는 서울에서 출발해 수원 화성행궁까지의 정조대왕 능행차 전 구간 재현을 처음으로 시작한다"며 "을묘년 진행된 8일간의 여정은 단순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행차가 아니라 위민정신을 몸소 실천하기 위한 소통과 통합, 위민의 길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수원과 서울시는 4대문과 성곽 등이 있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이에 2년 전 서울시장에게 능행차를 제안했다"며 "우리 시는 서울과 수원 전체구간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완결성을 높이고 구간별 지자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국민 공감 축제의 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김진관 수원시의회 의장은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을 기념하고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이해 마련된 학술대회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며 "정조대왕 을미년 원행을 재현하고 수도권을 하나로 연결하는 45km 대장정은 놓칠 수 없는 장관으로 세계적 시민참여 축제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낙천 화성연구회 이사장은 "오늘 학술대회는 수원화성방문의 해의 꽃인 정조 화성행차 재연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확인하는 자리"이며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만이 아닌 '백성을 위한 행차'였음을 강조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행차가 바로 정조의 화성행차였고 그 행차의 재연과 가치 조명은 후세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라며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의 의미를 밝혔다.

31일 라마다 프라자 수원호텔 대연회장에서 진행된 ‘세계무형유산등재를 위한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학술대회’(사진제공=수원시청)

이번 학술대회에서는'내가 만난 정조와 다산, 18년'이란 주제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정조대왕 능행차의 의의' ▲최성환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장의 '수원화성 행차 시 정조의 활동과 의미' ▲유재빈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의 '화성원행도의 미술사적 의의' ▲최필곤 KBS PD의 '다큐멘터리 의궤의 능행차 재현과 문화 콘텐츠 활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아래는 학술대회 발표내용을 정리했다.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와 다산의 만남 18년'

박석무 교수는 '정조와 다산의 만남, 18년' 기조강연에서 “정조의 능행차 기반사업과 정치이념 정착에 있어 정조와 다산의 만남은 성군과 현신이 만나 최고의 시너지효과를 이룬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어 "수원의 화성축조는 정조와 같은 위대한 임금이 위대한 신하를 등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다산 같은 학자이자 기술관료인 사람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여 국가적인 대역사를 맡겨 차질 없이 완료할 수 있었음은 전적으로 정조의 용인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정약용은 1792년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을 때 임금의 명령으로 성제를 연구해 설계도를 바쳤다.

성의 둘레는 5520m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 등 4개문을 비롯해 암문, 수문, 적대, 공심돈, 봉돈, 포루, 장대, 각루, 포사 등 각종 방어시설까지 구비했다.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 10일 완공하고 10월 9일 성대한 낙성연을 베푸는 것으로 성역이 끝났다.

체제공의 주관아래 정약용의 설계와 기계의 발명으로 10년 기간이 소요될 공기를 2년 9개월 만에 완공했고 4만 냥이라는 비용도 절감하게 됐다.

박 교수는 "다산과 정조의 만남으로 다산은 후에 공정, 공평, 청렴, 정의 평등이 이기는 세상의 설계도를 담아 많은 저서를 남겼다"며 "정조대왕 능행차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데 이 가치들을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문식(단국대 사학과)교수, '정조의 능행과 화성 행차'

김문식 교수는 '정조시대 능행차 의의' 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공동재현할 정조대왕 능행차에 대한 의미를 되새겼다.

능행이란 선왕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로 가장 장거리 이동, 국왕의 백성과 직접 접촉하면서 다양한 조치를 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는 정조가 국왕에 오른 지 20년을 기념하며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회갑을 맞는 해로 특별한 행차였다.

화성행차에서 정조는 자신의 친부모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정조가 화성 행차에서 보였던 효심은 신하들에게 사도세자의 복권이라는 충성을 요구하는 압력이 됐다.

또한 권력투쟁의 와중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자신의 직계혈통을 분명히 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는 능행을 통해 왕릉을 참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무예를 겨루게 하는 군사 훈련의 기회로 활용했다.

정조가 장용외영의 병력을 강화시킨 것은 현륭원이 있는 화성을 방어하는 동시에 국왕이 군대 통제권을 장악해 중앙의 군영까지 개혁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1795년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은 정조가 꾸준히 강화해 온 국왕이 무력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또한 화성행차는 양반층과 노인을 위한 행사로 정조는 화성에 도착한 다음날 별시를 거행해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했는데, 여기에는 화성에 거주하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 백성을 위한 조치였다.

우선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지급하고 1년 전 환곡상환을 연기시켰던 것을 모두 면제하고, 127건의민원을 해결하는 등 일반백성에게 경제적 해택을 줬다.

김 교수는 “단순한 행사의 복원이 아니라 21세기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고려해야한다”며 “10월 능행차 재현은 1795년에 정조가 이동했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복원하는 첫 번째 행사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221년 전의 행사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정조가 행차를 통해 보여주었던 부모님에 대한 효성, 노인봉양, 강종 민원의 해결, 국방력의 강화와 같은 의의를 되새기고, 현대 사회에 응용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고 의미를 밝혔다.

지난해 10월 9일 오후 '2015 수원화성문화제 정조대왕능행차' 시연을 하고 있다. 오는 10월에 진행되는 '능행차는 '정조의 화성행차가 백성에게 고통주는 왕의 행차가 아닌 백성들에게 행복주기위한 행차"임을 오롯히 재연될 계획이다. (사진제공=수원시청)

▲최성환(수원학연구센터), 수원 화성 행차시 정조의 활동과 그 의미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는 현륭원 참배 이외에 화성 성곽 건축과 상왕이 거주할 신도시를 조성한다는 특별한 목적을 겸하고 있었다.

정조는 은퇴 후 상왕이 된 후에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행궁에 거처하면서 아들의 손으로 사도세자의 추왕이 성사되고 혜경궁도 왕비가 되는 구상을 했다.

정조는 재위 17년에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으며 정조 19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연이 예정됨에 따라서 화성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이와 함께 정조는 수원화성행차와 건설과 관련, 어떠한 원망도 듣지 않기 위해 백성들에게 단지 1회성 은택을 베푸는 차원을 넘어서서 각종 폐단 혁파를 위한 대책과 제도를 강구했다.

또한 수원화성 행차 가운데서도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환갑잔치를 겸한 을묘년 원행은 궁중여인을 포함해 왕실의 친인척이 동반한 국가 차원의 대규모잔치로 사도세자를 추왕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서 거처하기 위한 신도시를 건설하려했던 정조의 정치적 구상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성 유수부 승격과 상왕 도시 구상에 따른 양경제 시도는 그 정점이었다.

결국 정조의 화성행차로 인해 건설된 신도시 수원은 경기남부의 주요 거점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이렇게 증축, 신축된 화성 행궁의 규모는 강화,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 동시기 유수부 행궁들 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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