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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세월호 3주기에 띄우는 만가

[강원=아시아뉴스통신] 이순철기자 송고시간 2017-04-15 17:01

강릉시민 함동식
만가(輓歌)는 죽은자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이다.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4월만 되면 거의 매일 듣는 노래가 있다.
 
영국의 하드록 그룹 딥 퍼플(Deep Purple)의 에이프럴(April)이다. 이 곡은 딥 퍼플 1기의 마지막 앨범인 정규 앨범 3집에 수록된 곡으로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소재로 만들었는데 길이만도 12분이 넘고 보컬이 등장 하기전 전주부분만 8분 50초가 걸리는 좀 지루한 노래이다.
 
딥퍼플의 간결하고 파워풀한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마치 관현악곡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예전에는 잘 듣지 않았던 곡이다.
 
나이가 들면 취향도 변하는가 보다. 하기야 세월 앞에서 온전한게 무엇이 있겠는가. 예전에는 그냥 무심하게 들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구슬픈 통곡소리요 애절한 슬픈 만가로 바뀌었다.
 
지난 2월 강릉 소재 모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훈장질로 먹고사는 내 친구 전충택 선생과 2박 3일 남도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목포에서 1박 하고 이틀째 되는날 우리는 진도 팽목항에 들른적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의 영정이 모셔진 분향소에서 앳된 얼굴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물 많은 전 선생은 팽목항을 떠날때까지 눈물을 흘렸었다. 미수습자 유가족들과 차 한잔을 나누면서 그들의 절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가 있었다.
 
1816년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프랑스 선적의 메두사호가 난파된 사건이 있었다.
 
선장은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책임자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사고의 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세계 해양사에 기록 될 만한 참사였으며 세월호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세월호 사건은 기억하기도 싫은 대참사이다. 그런데 이 참혹한 사건 자체보다도 사고 수습과정이나 그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에 있어서 정부와 우리 사회가 보여준 태도와 몰상식함에 더큰 분노를 느꼈다.
 
재난의 콘트롤 타워인 청와대가 YTN 뉴스를 보고 사고 소식을 처음 알았다거나 대통령의 소재를 몰라 보고서를 작성하여 관저로 집무실로 뛰어 갔다는 말을 듣고 할말을 잃었었다.
 
정부 여당은 진실 규명의 의지가 없었으며 오히려 국민들을 이간질 하여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반쪽짜리 세월호 특별법은 진통 끝에 국회를 겨우 통과하였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 하였다.

정부의 뒷돈을 받고 관제데모에 동원된 관변단체 회원들은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피자 파티를 벌려놓고 유족들을 조롱하였다.
 
논어 술이(述而) 편에 보면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를 할때에는 배불리 먹지 않았다.(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자식어유상자지측 미상포야) 라는 구절이 나온다.
 
옛 선비들은 법질서가 파괴됨은 작은 일이요. 도덕이 무너지는 것은 큰일로 보았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예의 도덕도 없는 추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이 추악함을 부추긴 박근혜 정부는 남경대학살을 저지르고 파티를 벌렸다는 당시 일본정부와 무엇이 다른가.
 
세월호는 슬픔이요 고통이다. 뭍으로 끌어 올려진 녹슨 세월호는 우리의 얼굴이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지나간 일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역사는 퇴보한다.
 
프랑스에서 가장 치욕적인 말은 콜라보라퇴르(collaborateur)라는 단어이다. 영어의 콜라보레이션의 프랑스식 표기로 협력,협업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좋은 단어였으나 2차대전중 독일 강점기 4년(1940~1944)을 거치면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짧은 나치 강점기에도 부역자들을 3만 8000명을 구속하고 1500명을 처형하였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36년 일제 강점기를 거쳤지만 고작 14명만 구속하고 사형집행은 단 한명도 없었다.
 
프랑스도 부역자 처단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치 괴뢰정권인 비시(Vichy) 정부의 내각 수반 필리프 페탱(Philippe Petain)이다. 그는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며 국부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 페탱은 주 스페인 대사로 나가 있었다. 이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귀국을 원했고 귀국 후 전세가 불리하자 나치에 항복하였다.
 
페탱을 처단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을 때 그가 나치 협력자인가 아닌가의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직면하였으며 치열한 법정 공방이 전개되었다. 페탱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복하였고 그의 군시절 직속 부하였던 샤를 드골은 영국으로 도망 가버렸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항복한거나 도망간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는 작은 허물도 용서하지 않았다. 배심원 표결 결과 14대13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며 드골은 페탱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여 대서양 연안 일디외섬의 감옥에 수감시켰다.
 
지금도 페탱을 두고 논란이 많다. 1차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였던 페탱은 수감생활 6년만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발전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없었다. 그 이후 독재정권이 이어져 왔지만 국민적 총의가 모아진 평가나 청산이 없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암울하다. 그 암울한 먹구름이 세월호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먹구름은 비가 되어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새 정부는 유족과 국민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역사가 한 걸음 진보 한다.
 
세월호 사건도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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