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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원세종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정혜미기자 송고시간 2017-12-18 08:23

 
MG원세종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이 제17회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원세종새마을금고)

MG원세종새마을금고 이성원 이사장은 지난달 1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2017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시상식에서 인권옹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시상위원회가 주최하고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 언론인연합협의회 등이 주관한 이번 시상식은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각 분야에서 투철한 사명감과 확고한 국가관으로 지역 및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선정했다.

이성원 이사장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인권운동을 선도한 ‘인간상록수’로서 한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해온 공로를 높게 인정받아 수상의 명예를 얻었다.

세종시 문학의 산증인이자, 89세의 원로소설가이면서 기자 및 사회운동가로 활약해온 김제영 작가는 본지 기자와의 만남에서 “이성원 이사장은 연기군이 지금의 세종시로 발전되기까지 지역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이어 김 작가는 서울역에서 신문팔이를 하면서 돈을 모아 비진학자를 위해 가축보급운동을 했던 이성원 이사장의 청년시절 모습을 회고하며, 뜨거운 열정으로 봉사하고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온 공로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민간인 신분으로 전국을 누비며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 운동' 펼친 이성원 이사장.(사진제공=원세종새마을금고)

◆인권의 중요성 설파하며 8만여 명의 무적자 구제

세종시를 빛낸 불세출의 명인, 이성원 이사장은 국내 최초 인권의 중요성을 설파해 사회적 의식을 높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숭고한 봉사의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6.25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부모형제를 잃고, 굶주리며 방황하는 수많은 부랑아들을 모아 사랑으로 지도했다.

또한 호적이 없어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무적자들을 위해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펼쳐 8만여 명에게 구제의 길을 열어준 대한민국 1호 인권운동가로 기록된다.

?“1960년대 무호적자수가 무려 12만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병역기피자나 범법자 4만 명을 제외한 8만 명은 갖가지 사연으로 호적을 갖지 못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권리나 의무를 행사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무적자들은 학교 교육은 물론 취업을 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또 병역의 의무는 물론이고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도 못했으며, 자식을 낳아도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이성원 이사장은 인간의 기본권인 호적이 없음으로써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그들의 처참한 삶을 가엾게 여기고, 196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무호적자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주창했다.

당시 그는 각 언론사뿐 아니라, 대통령, 대법원장,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보건사회부장관, 서울시장, 각 시도지사 변호사협회장, 중앙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등에 호소문을 발송했으며, 직접 플랜카드를 어깨에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리 캠페인을 펼쳤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언론사마다 앞 다퉈 그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이성원 이사장의 인권옹호 활동이 집중조명을 받았다. 신문 지면에는 ‘무호적 청소년들에게 호적을’이란 플랜카드를 어깨에 둘러멘 이성원 이사장의 사진이 함께 실리며 화제를 낳았다.

민간인으로서 무적자들에 대한 인권의식에 경종을 울린 최초의 범국민적 인권수호운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끌었다. 당시 이성원 이사장은 개인이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오직 무적자들에게 인권을 찾아주기 위한 일념으로 혼신을 다했으며, 그의 불굴의 의지는 결실을 맺었다.

그가 무호적자들을 사회 안전망에 들여놓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법무부로부터 무호적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이 발표됐다.

또 호적 정리뿐만 아니라 증민등록증도 발급하게 하는 등 사회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전까지는 도민증, 시민증으로 지역을 구분했지만, 1968년 10월 말부터 전 국민들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등 차별 없는 사회로 변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성원 이사장은 부랑아들의 따뜻한 보금자리인 희망원을 지었다.(사진제공=원세종새마을금고)

◆거리의 천사들 위해 희망원 설립

이성원 이사장은 조치원역 거리를 배회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의 아버지였다. 애국심과 봉사정신이 투철했던 부친 故 이영복 선생(국가유공자)의 영향을 받아 학창시절부터 봉사정신이 남달랐던 그는 철도역무원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청소년 선도를 본격화했다.

그는 역 주위에서 앵벌이를 하고, 어두컴컴한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걸인소굴을 직접 찾아다니며 선도했다. 청주무심천교, 대전 목척교, 천안 남천교, 예산 예산천교, 홍성 광천교, 광천 옹암교, 대천 대천교 등 다리 밑의 냄새나는 걸인소굴을 누비며 얻어먹던 깡통을 버리고 ‘우리의 가난을 우리가 몰아내자’고 외쳤다.

또 이성원 이사장은 1964년 부친 소유의 땅에 희망원을 건립한 후 500여명의 원생들을 돌보면서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교육했다.

국가 보조금 없이 순수 사재를 털어 희망원을 운영하면서도 4H구락부 운동과 가축보급 운동도 펼쳤으며 학교 순회 선도 교육에도 앞장섰다. 희망원생들에게 농사 짓기, 철사 수공품 만들기, 운전기술 등을 가르치면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지난 1970년대에는 국내 최초 민간인 주도 합동결혼식을 열어 1,500여명 하객들의 축하 속에서 희망원생들이 부부의 연을 맺도록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한 바 있다.

자립갱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바른 길로 선도한 이성원 이사장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조치원역을 배회하던 부랑아들과 다리 밑에서 처참한 생활을 하던 걸인들은 이제 학교 졸업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등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희망원생들은 여전히 그를 ‘원장님’으로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를 뿐 아니라 이성원 이사장 또한 희망원생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애정을 쏟고 있었다. 희망원생 중에서는 조치원 역 주변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구두닦이를 하는 등 고된 생업에 쫒기면서도 이성원 이사장의 진실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발전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성원 이사장은 걸인소굴을 누비며 얻어먹던 깡통을 버리고 ‘우리의 가난을 우리가 몰아내자’고 외쳤다.(사진제공=원세종새마을금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며 나눔 문화 실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정신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해온 이성원 이사장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매순간 주어진 일에 충실히 해왔을 뿐이다. 국고 보조 받지 않고 땅 팔고, 양복 팔아서 봉사를 해왔다. 하지만 12.12정변의 혼란한 틈을 타 허위모략에 대전형무소까지 다녀오는 등 갖은 핍박으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불우한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빈농의 자녀들에게 가축을 기르게 해주어 희망을 안겨줬으며, 무적자들을 위해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펼쳐온 지난 인생길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라며 진심을 전했다.

이성원 이사장은 앞으로 MG원세종새마을금고 수장으로서 지역민들을 위한 서민금고 운영에 힘쓸 것이며, 건강이 허락되는 한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회봉사인으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사랑의 정(情)을 중시하며 한평생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온정을 베풀어온 이성원 이사장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기리며, 그의 위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를 빛낸 인권운동가로서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돼 국가 위상을 드높이길 기대한다.

정혜미기자 celin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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