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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특집] 수당 이남규 선생 일가... 4대에 걸친 나라 사랑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이종선기자 송고시간 2018-08-14 14:05

예산 수당가 163년 애국의 길...광복절에 더욱 빛나

수당 이남규 선생 일가...(왼쪽부터) 1대 이남규, 2대 이충구, 3대 이승복, 4대 이장원./아시아뉴스통신 DB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절대 굴하지 않고 선비의 기개를 지켜낸 수당 이남규 선생 일가의 4대에 걸친 163년 나라사랑 애국정신이 8.15 광복절을 맞아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수당가는 1대 이남규 선생을 비롯해 맏아들 이충구, 손자 이승복, 증손자 이장원 등 4대가 나라를 위해 싸워 모두 훈장을 받은 국내사에 그 유래가 없는 명문의 유업을 이어왔다.

수당 이남규 선생(1855∼1907)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서울 미동에서 태어나 1875년 향시와 사마시 양과에 급제했다. 1882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2등으로 합격했으며 1899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됐다.

1906년 홍주의병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병오의병때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숨겨 줘 1907년 공주 감옥에 투옥됐다가 출감한 뒤 아들 이충구와 함께 충남 온양 평촌에서 피살됐다.

수당 선생은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197명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일제에 맞서 그에 대한 방비와 대비책을 진언하고 규탄하며 끊임없이 맞서 싸우다 죽는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사랑방 평원정에 앉아서 일제의 전통문화 훼손정책의 하나인 단발령에도 “머리를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르지 못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자 홍주의병을 적극 지원하고 의병을 모의해 결국 일본군은 1907년 선생이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오랏줄로 묶으려 했다. 이때 선생은 이를 뿌리치며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는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이라는 말을 남겼다.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선 선생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르러 일본군의 마지막 회유에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며 굴하지 않아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1874∼1907,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와 가마를 메고 가던 시자(侍子, 귀한 사람을 받들고 모시는 노비를 높여 부르는 말) 김응길(건국훈장 애족장)과 가수복도 일본군의 칼에 맞아 순국했다.

손자 이승복(1895∼1978)은 만주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로 언론사와 신한국당에서 활동하다 1978년 10월 서거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증손자 이장원(1929∼1951)은 6.25때 원산 전투에서 전사해 1963년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돼 현재 4대가 현충원에 묻혀있다.
정부는 수당가의 4대가 나라를 위해 싸운 애국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수당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수당고택./아시아뉴스통신=이종선 기자

● 수당고택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2 이남규 선생 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예산읍에서 산길과 들판 길을 따라 20여분 가면 방산 저수지 뚝방에 가로 놓인 전형적인 산간 벽지마을이 길을 막는다.
이남규 선생은 조선말인 고종때 일본공사 오도리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했다. 그 후로 명성왕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격분해 벼슬을 놓고 이곳으로 낙향했다.

수당고택은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 손자인 이구가 죽자 그의 부인이 1637년(인조15년) 아계의 묘소 근처에 터를 잡고 직접 집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시대 여성으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846년(헌종12년)에 다시 지어져 9년 뒤 이남규 선생이 태어났다.

고택구조는 남향집으로 모두 5량(樑)의 굴도리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툇마루와 서쪽 별당인 평원정(平遠亭)이 있다. 안채의 좌측 끝은 맞배지붕이고, 대청 전면만은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겹처마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1976년 7월 7일 충남도 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된 고택은 2014년 2월 25일 국가민속문화재 281호로 승격돼 증손자인 이문원씨 소유로 돼 있다.

이 집의 안채는 중문간을 ‘ㅡ’ 자형으로 배치해 대문을 열면 훤히 보이도록 했고 안채를 ‘ㄷ’ 자형으로 감싸 전체적인 구조가 ‘ㅁ’ 자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는 여자들의 주생활 영역으로 깊숙이 위치해 외부로부터 격리,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안주인의 거처도 대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제한시키기 위해 친척 외에는 남자들을 접견을 못하도록 한 당시의 사회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당기념관./아시아뉴스통신=이종선 기자

● 수당기념관
수당기념관 전시장에는 수당가에 전해져 오는 선대유물과 고문서 등 수당의 정신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 세대를 거친 애국.애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는 교육과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1900년 고종이 함경북도 안렴사 이남규에게 남긴 밀지와 이건창이 지은 수당기가 보관돼 있으며, 이남규를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면한다는 고종의 칙명(교지), 이남규의 벼루와 벼루집, 호패, 필통, 결재도장(수결), 호수와 호수통 등이 전시돼 있다.

현재 기념관은 증손자인 이장원씨의 동생인 중앙대 명예교수를 역임하고 2001년 6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이문원(81) 관장이 맡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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