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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 17일 화요일

[8.15특집] 해방둥이를 만나다!..."빈 손에서 이룬 기적"

예산교통 조강현 대표이사가 걸어온 광복 73년

(아시아뉴스통신= 이종선기자) 기사입력 : 2018년 08월 14일 14시 47분

조강현 예산교통 대표이사가 해방둥이로 태어나 자신이 걸어온 인생역전 드라마 같은 삶을 털어놨다./아시아뉴스통신=이종선

광복의 함성과 6.25 전쟁의 통곡소리에 깨어나 외환위기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경제성장의 중심에서 자신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자식세대의 번영을 위해 힘든 줄 모르고 일해 온 해방둥이들...
예산군의 농어촌버스 업체인 예산교통 조강현 사장을 통해 그의 인생역전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조강현 사장은 외아들이었던 선친이 충북 제천 청풍면에서 방앗간과 제재소를 운영해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4남5녀 중 장자로 해방직후인 1945년 11월 4일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재산에 큰 욕심이 없었던 선친은 해방이 되면서 돈 벌기에 앞서 가르쳐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그가 태어나면서 결심이 섰던 것으로 훗날 알게 됐다.
하지만 이미 일제 강점기에 전 재산을 수탈당하고 힘겹게 해방을 맞이했던 선친은 온갖 굳은 일을 마다않고 궁색함속에도 자식을 가르치는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조강현 사장은 해방둥이로 태어난 광복 73주년을 맞아 자신이 걸어 온 길을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외아들로 성장했던 선친은 홀로된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듯 이후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면서,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지고 황달병까지 생겨 학업을 접고 징집을 거부당한 채 직업전선에 나서야했다.
당시 온 동네가 점심 굶는 건 다반사고 저녁을 고구마로 연명하던 1966년 22살이 되던 해 대전 한 주유소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1969년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조그만 점포에서 오일판매를 시작한 것이 지금의 협신상사를 설립한 모태가 됐다.

부모가 살았던 충북 제천 청풍면에서 해방과 동시에 옥천으로 낙향해 이곳서 태어난 그는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공고를 나와 충남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고학으로 다니다가 영양실조로 황달병이 생겨 결국 2학년말 중퇴하고 말았다.

당시는 간장에 좋은 약이 없어 한번 발병하면 사망률이 높은데다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야 낫는 병인데 집안이 어려워 그럴 형편이 못됐다.
하지만 조부께서 집안의 장손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심신산골을 찾아다니며 간에 좋다는 약초는 모두 구해다 민간요법으로 살려냈다.

그후 1967년 당시는 기름이 배급제였던 시절로 대전 대흥동 소재 국제주유소 주유원 겸 배달원으로 취직해 경험을 쌓았다.
1969년 충남교통 본사에 윤활유를 납품하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예산으로 이사와 예산읍 오리동에 조그만 사무실과 창고가 있는 1000원짜리 월세방을 얻어 윤활유 판매를 시작했다.
그때는 장항선 일원의 거래처에 윤활유 드럼을 탁송하는데 예산역까지 1드럼에 500원씩 하는 운임을 아끼려고 리어카로 직접 실어 날랐다.
서서히 예산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했다.

당시 예산주민 성향은 타지역 사람에게는 상당히 배타적이어서 주위사람과 친분을 맺기가 꽤나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하나밖에 없던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하고, 좀더 가까이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한국석유공사 예산영업소장의 도움과 공주청년회의소 후원으로 예산청년회의소(J.C)를 창립했다.

이처럼 젊은 청년들의 지도역량을 계발하는데 일조하고, 불혹이 되면 탈퇴해야 하는 회칙에 따라 중장년들의 모임인 로타리클럽을 선배 지인과 온양로타리클럽의 후원을 받아 창립시켰다.

이같이 예산에 정착하면서 신의와 원칙을 지켜 경우에 어긋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불철주야 영업을 해 나갔다.
이때 얻는 지식은 돈에 욕심을 부리고 쫓아다니면 실패가 뒤 따르고, 열심히 노력해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면 언젠가는 통장에 돈이 모아질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마침내 기름장사들의 꿈인 현대정유회사 충남대리점을 개점하고 서부충남일원과 경기도에도 진출해 급성장하면서 10여개의 직영주유소를 운영했다.
정유회사 대리점를 운영하면서도 기름 한방울이 아까워 보일러도 놓지 않고 아궁이 연탄으로 생활해가며, 아내는 세탁기가 없어 냇가에서 손빨래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이 있기까지 고향이나 다름없는 예산에서 50여년을 살며 이제 남은여생은 군민의 고마움을 안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의 주유소는 과거와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기름 마진은 쪼그라들고 인건비와 관리비는 천정부지로 올라 기름장사 47년에 수년째 적자운영을 하고 있다.
남들이 보기엔 주유소업이 좋아 보이지만 경쟁과열과 수익성 저하로 인건비도 나오질 않는데다, 정부가 알뜰주유소 확대로 국내 주유소 7000∼8000개가 적정수인데 현재 1만2000여개나 되면서 지난해 700여곳이 휴.폐업한 상태로 유령주유소만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오직 정유회사 제품을 취급해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군민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으며,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지역사회에 보답키로 광복 73주년에 즈음해 각오를 다진다.

그는 2005년 기름장사는 앞으로 전망이 없다고 판단해 아직도 활동할 나이에 고심하던 중 평소 도움 준 지인이 파산으로 예산교통에 수십대의 지입버스가 경매에 넘어가 이를 인수하고, 1년뒤 국토해양부의 지침에 따라 본의 아닌 대주주로 예산교통 대표이사가 됐다.

회사를 인수하고 보니 버스는 전부 압류됐고 퇴직한 운전기사들이 퇴직금을 못 받아 소송중인 서류가 여기저기 수북이 쌓여 있었다.

1969년도 예산군은 자가용은 없고 관용차도 4∼5대에 불과해 인구 16만7000여명에 예산교통 버스는 29대로 호황을 누렸다.
반면 인수당시 인구는 9만여명으로 줄었으나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버스는 69대로 40대나 늘어난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도 승객은 없고 관리비와 인건비 지출이 많아 회사 자본금은 전부 잠식당하며 적자 누적액이 10여억원이나 됐다.
년수입 70억원은 돼야 현상유지 하는데 40억원에 불과하니 자연히 퇴직금은 고사하고 월급마저 2∼3개월씩 체불됐다.
노사가 머리를 맞댔다. 운전기사들과 원만하게 타협이 성사돼 회사의 정상운영을 위한 요구에 적극 부응하고 사업주는 월급과 퇴직금을 제날짜에 지급한다는 약속을 지켜냈다.
이로써 충남도와 대전 버스운송사업체중 유일하게 지난 2009년 9월1일 노동부장관으로부터 노.사상생 양보교섭 실천기업으로 인증서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이 뿐만아니라 충남도내 유일하게 회사와 근로자들이 상조은행을 설립해 직원이면 누구든지 500만원까지 대출받아 월 30만원씩 분할 상환토록 했으며, 구내식당을 운영해 영양식단으로 기사들의 건강을 챙기고 퇴직연금도 회사가 가입해 부담을 줄였다.
이처럼 근로자들의 급여와 복지향상을 우선으로 회사를 운영한 결과 2014년 회사운영 10여년만에 작지만 흑자결산을 이뤘다.

지금도 회사는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어 농촌에 산재해 있는 노약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생존을 위해 고물하나 폐지 한장도 버리지 않고 팔아 잡수입으로 잡고 있으며, 출장비와 하계수당을 10년째 반납하고 심지어는 이때 사내 에어컨을 모두 없앴다.
이같은 경영방식에 몇몇 사원의 불평불만에도 흔들림 없이 운영해 도내 유일하게 만58세의 정년제를 폐지하고, 부적격 사유가 없는 한 평생 근무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고는 매년 찜통 같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부터 에어컨을 새로 설치했다.

조강현 사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지역을 위해 활동하다 족적을 남기고 떠날 때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예산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며 말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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