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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신학생들이 재연한 "대한독립만세"

[대구경북=아시아뉴스통신] 박종률기자 송고시간 2019-03-05 17:48

대구가톨릭대, 3‧5만세운동 재조명 학술행사‧음악회 개최
5일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캠퍼스 성유스티노성당에서 열린 '3.5 만세운동 기념 작은 음악회'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치고 있다.(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이 100년 전 선배 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뜨겁게 외쳤던 "대한독립만세"를 재연했다.

대구가톨릭대는 5일 유스티노캠퍼스 내 성유스티노성당에서 '3‧5 만세운동 기념 작은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곳은 대구가톨릭대의 모태인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5일 교내에서 대구.경북 최초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조환길 대주교, 김정우 대구가톨릭대 총장, 이경수 대구가톨릭대의료원장, 이태순 대구가톨릭대 총동창회장, 대구가톨릭대 교수와 학생 등이 참석해 100년 전 신학생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렸다.

대구가톨릭대 성악과 김은주 교수가 '그리운 금강산'을 독창했고, 관현악과 아마레 앙상블이 '내 나라 내 겨레'를 연주했다.
 
5일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캠퍼스 성유스티노성당에서 열린 '3.5 만세운동 기념 작은 음악회'에서 음악대학 학생들과 참석자들이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

일반대학원 신학과의 박균배씨가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3.1운동 당시의 결연한 독립 의지를 재연했고, 신학전공 장준영 학생과 신학생들은 참석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성악과 합창대는 참석자와 함께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며 3.5 만세운동의 숭고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겼다.

대구가톨릭대는 음악회에 이어 유스티노캠퍼스 대강당에서 '3.1운동과 대구대교구'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일제 강점기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지역사회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재조명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성격과 3.1운동'을 주제로 발표한 이경규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는 "100년 전 오늘 우리는 하나였다. 3.1운동 못지않게 전 국민이 하나가 된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며, 이 운동을 발기하고 주도해갔던 분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국권수호운동이며, 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은 수많은 서민계층이 참여한 대중운동으로 3.1운동의 바탕이 됐다"고 강조했다.
 
5일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캠퍼스 대강당에서 열린 '3.1운동과 대구대교구' 심포지엄에서 천주교 대구대교구 조환길 대주교가 격려사를 하고 있다.(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

김정숙 영남대 교수는 '대구 평신도들의 항일 운동'을 발표했다.

김 교수는 "대구교구 서상돈, 김우정 형제, 정행국 형제, 정준수는 건국훈장을 받은 이들이다. 서상돈은 계산성당 건립에 앞장섰고, 국채보상운동을 폈다. 이 정신은 계산성당 김하정, 김찬수 등의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 이 청년들은 해성청년회로 재편성, 애국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왜관성당의 정행국 형제도 청년동지들과 함께 항일.교육운동을 펼쳤다. 더욱이 드망즈 주교의 전교회장이었던 정준수는 천주교 항일무장단체인 의민단에서 투쟁했고, 의민단이 해체된 후에는 중국에 천주교 교우촌(선목촌)을 세웠다. 교회는 이들 활동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이들 집안은 각기 십여명이 넘는 사제·수도 성소를 내었다. 각 본당에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또한 당시의 청년운동은 전국 연계적이고 해외와도 연결돼 있었다"고 말했다.

김태형 영남교회사연구소장(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성유스티노신학교의 3.1운동'을 주제로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의 과정과 3.1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집중 조명했다.

김 소장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은 학교 당국 모르게 긴급회의를 열고 윌슨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낸 후 3월9일 대구 약전골목에서 진행될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신학생 김구정은 홍순일 선생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당일 시민들에게 뿌리기로 준비하고 신학생 서정도는 신학생들이 들고 나갈 태극기를 만들기로 책임지게 됐다. 그러나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가는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의 만류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철저한 정교 분리원칙을 고수해 한국의 현실적인 고통과 독립운동을 외면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3월5일부터 시작해 대중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성유스티노신학교의 만세운동은 민중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신학생들의 고귀한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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