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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박상진의 삼국지 탐구

[인천=아시아뉴스통신] 김선근기자 송고시간 2014-11-21 17:31

제17편 이심전심(以心傳心)
 박상진 서울대학교 사범대 연구생./아시아뉴스통신DB

 한 때 다른 의미로 패러디된 바 있는 단어 ‘이심전심’은 불교의 고사에서 유래한 사자성어입니다.

 어느 날 야단법석(野壇法席, 야외에 마련된 설법의 자리)에 나온 부처가 조용히 연꽃을 드니 제자들은 그 행동을 보고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묵언(黙言)으로 설법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오직 한 사람, 가섭(迦葉)이라는 제자만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에 부처는 “문자로 이르지 않아도 진리는 전해질 수 있다(不立文字, 敎外別傳)”고 설법을 마쳤다 하는데 바로 이것으로부터 ‘이심전심’이라는 사자성어가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송나라 때 만들어진 전등록(傳燈錄), 승려 보제(普濟)의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실려 있습니다.

 이른바 도가 통한 고승들은 서로 말 없이 도를 전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요.

 지난 시간 말씀드렸던 조조의 ‘류베이포비아(Liu-beiphobia)’ 역시 이런 이심전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안 초 관도대전이 한창일 즈음부터 유비는 진심 원소를 버리려고 작정합니다.

 그 원인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서주를 후원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과 함께 지나칠 정도의 신중, 또는 겁 많은 태도에 대한 회의(懷疑)로 보입니다.

 촉서 선주전(先主傳)에서 노골적으로 그것을 언급하는 점으로 보면 얼마나 유비의 속내가 주변에 이미 드러났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지요.

 원소에게 희망이 없다면 다음이 유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말입니다.

 드디어 건안 6년(201년) 유비는 자기 오른팔인 미축과 손건을 유표에게 보냅니다.

 유비의 결심이 이 무렵 확고해졌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초기 유비의 외교 활동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유표는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맞이함과 동시에 신야현(新野縣)에 그 무리를 배치합니다.

 일찍이 그 만한 군벌 세력을 가까이 둔 적도 있었던 유표이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또 유비를 그리 순순히 용인하는 것 역시 오랜 교감이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렵 조조의 행보 역시 참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건안 8년(203년) 조조는 원소를 누르고 관도대전의 도입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선점한 것일 뿐이지 아직 승리를 확정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평소의 조조라면 응당 북진을 시책으로 확정하고 그대로 밀어붙여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예상을 깨고 예주의 서평(西平)으로 나아가 형주를 엿보려고 합니다.

 완현(宛縣)에 있던 장수(張繡)가 항복한 이후 한 동안 움직임이 없던 조조가 말입니다.

 물론 기록 상 그 공습은 건안 13년(208년) 이전까지 그 대목 단 한 번뿐입니다.

 더욱이 조조는 남쪽으로 가려고 순욱에게 속내를 드러내 저지를 당하기도 하지요.

 저는 시기로 볼 때 “왜 유비가 떠난 직후 조조도 형주로 급히 가려고 했는지” 반드시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술의 대가라고 자부하는 조조의 행보였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가 닿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유비가 2년 전 먼저 도망쳤다는 사실을 빼면 말입니다.

 이러니 유비 공포증에 시달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조조는 유비의 형주 도주를 듣고 시쳇말로 얼굴이 하얗게 변했을 것입니다.

 역시 유비로구나, 라고 생각했겠지요.

 원소라는 거대한 세력을 잠재우려고 바둥거릴 그 7년이라는 세월이 유비에게 ‘형주에서 칼을 갈’ 시간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참 골치 아픈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거기에 유표의 세력 역시 막강하고 형주도 반조(反曺) 성향의 인재들 역시 넘쳐나는 곳이라는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형주 수뇌부들은 몰라도 적어도 백성과 유생 중 일부는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죠. 실제 조조의 이런 우려는 남하 과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드러났습니다.

 많은 인재들의 귀순도 뒤따랐지만, 반면 유비에게 붙은 인물도 많았지요.

 이때부터 유비는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 조조의 대항마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막 북쪽에서 온 따끈한 정보를 들고 유표 진영으로 들어가 그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누구에게 가감 없이 전해준 유비, 그가 순식간에 형주의 주요 인사로 발돋움하는 것도 참 교묘한 술법으로 보일 정도이니 말입니다.

 아마 이 정도라면 조조와 유비를 두고 적벽대전의 원인 운운한 이유를 좀 아실 것입니다.

 조조의 행보 중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여러 장면들은 이제 이번 시간 이후로 서서히 그 본질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빈 공간에 ‘유비’를 대입시켜 보면 모두 드러날테니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유비는 손권과도 이미 교감을 한 뒤 다시 한 번 멋지게 그를 속이고 적벽에서 불바다를 연출하는 쾌거까지 보여주게 됩니다.

 아마 조조라면 이 대목에서 허탈감과 울분, 분노를 한꺼번에 느꼈을 테지요.

 그러니 손권을 때려잡으려고 바로 몽둥이를 들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 하필 평생의 원수가 될 두 사람이 이럴 줄이야 뉘라서 알았겠습니까.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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