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05일 수요일
뉴스홈 칼럼(기고)
(기고)박상진의 삼국지 탐구

[인천=아시아뉴스통신] 김선근기자 송고시간 2016-06-27 10:43

제100편 마지막 특별편 : 당신은 관우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박상진 서울대학교 사범대 연구생./아시아뉴스통신 DB

제목을 보신 순간, 여러분들의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을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관점에 서 있든, 이 주제는 최고이자 최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국지’라는 한 역사책에 적힌 긴 이야기들을 서사시도, 인물약전도 아닌 하나의 이야기, 그 모양대로 다루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다 다루지 않고, 오직 이야기의 흐름에만 집중한 것이지요.

제가 그랬던 이유는 늘 이런 인물로 들어올 때 발생하는 논란 때문입니다.

이 사서의 기록자 진수는 아주 미묘한 입장에 처한 인물입니다.

그의 조국 계한은 멸망당했고, 그를 잡아먹은 적국 위나라도 멸망했으며, 그는 적국도, 동맹국도 아닌 제3국 서진의 체제 안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강유와 종회의 병란(兵亂) 중에 기록물을 상당히 소실당하면서 조국에 대한 기록은 간략해진 반면, 위나라와 오나라는 풍부한 사료 덕분에 자신들의 입장을 사서에 충분히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만큼 전후 직전 세대로서 정직한 역사기록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5사 중 하나로 포함되었으면서도, 삼국지는 진서와 함께 늘 애매한 평가를 받습니다. 진실 40%를 부풀려 자신의 입장을 비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요.

제가 그렇게 보는 까닭 중 하나가 바로 배주(裵注), 즉 배송지의 보완 때문입니다.

북방을 잃고 더 혼란스러운 시대를 겪은 유송(劉宋)의 역사가도 해낸 ‘그 어려운’ 일을, 왜 진수만 간략하다는 핑계 뒤에 숨어서 위-오 정통론의 불씨를 남겼던 것일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계한 정통론을 주장하자는 취지는 아니고, 왜 사마광의 무통론(無統論) 같은 회색지대를 포기했냐는거죠)

아마도 그는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의 후예로서 간과 쓸개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준 게 바로 관우와 장비, 마초, 황충, 그리고 조운을 엮은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촉지(蜀志)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위, 촉, 오, 라는 순서를 만든 삼국지의 이 편제는 참 기묘합니다.

이름은 적국에서 자신의 조국을 부르던 ‘지방명’, 위치는 사료가 풍부한 두 나라의 ‘가운데’, 그리고 가장 적은 분량임에도 마지막 양희전을 배치, 계한보신찬(季漢補臣讚)을 본 내용에 포함시킨 점이 그렇습니다.

다음 두 사서의 서로 다른 시선 간 공존입니다.

진수는 자신의 평가에 관우와 장비를 상당히 혹평한 반면, 양희의 칭찬을 함께 촉지 마지막에 추가시키는 ‘미묘한 편집’을 합니다.

특히 양희는 관우와 장비를 일러 오한(吳漢), 경감(耿?)에 비견한 것으로 말하면서 ‘경솔한 생각 때문에 나라를 바로 잡으려던 일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강하지면 자아도취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은혜마저 없어 그 단점 때문에 죽었다(羽剛而自矜,飛暴而無恩,以短取敗)’는 말에 비해서 보면 말이죠.

과연 진수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관우의 시호인 장무후(壯繆侯, 원 한자독음에 의한 표기로 ‘무(繆)’를 ‘목(穆)’으로 이해하고 독음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음)는 그 해답을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우의 시호는 그의 사망 당시 주어지지 않았다가 계한의 멸망 직전 내려진 것입니다.

물론 시호를 계한 조정에서 받은 대부분이 그렇죠.

그러니까 이 시호는 당대인들의 관우에 대한, 특히 계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이 ‘무’인데, 이것을 ‘목’으로 보고 이해하지요.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잡히는데,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것과 “야전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양희의 기록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대부분의 계한 사람들은 관우의 사망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우금과 7군을 격파하고 중원을 진동시켰으나 오나라의 배신(?)으로 본성인 강릉(江陵)과 남군(南郡), 그리고 요충지 공안(公安)을 잃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계한 사람들은 그의 그 수 많은 명성이 이 오나라의 배신으로 무너질 것을 특히 염려하였던 듯 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시호에서도 여실히 그 패배를 통탄스럽게 여긴다는 의미를 포함시킨 것이죠.

진수는 스스로 살고자 옛 조국의 대신, 그 중에서 개국공신을 혹평하거나, 간혹 제갈량의 경우처럼 재평가를 받는 인물을 쫓아 문집을 내주는 등, 매우 간활(奸猾)한 행보를 구사합니다. 쉽게 말해 시류에 영합한거죠.

그러면서도 슬쩍 양희전에 계한보신찬을 끼워넣으면서 자신의 동족들이 그들을 바라봤던 시선, 또는 차마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싣습니다.

그것이 제게 ‘내가 친일 행각을 하더라도 이해해다오’라는 친일파의 변명처럼 보이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