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04일 토요일
뉴스홈 칼럼(기고)
(기고) 청백리 오리 대감과 곤장1대

[인천=아시아뉴스통신] 양행복기자 송고시간 2019-12-11 04:23

인천남동경찰서 만수지구대장 강철희.(사진제공=남동경찰서)


내 고향은 경기도 광명시다. 어렸을 적에 고향집에서 남쪽으로 1.2km떨어진 초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바로 붙어 이웃한 마을은 ‘오리동’이다.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에 이르기까지 3대왕 기간에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역임한 이원익 대감의 호가 ‘오리(梧里)’인데 대감께서 영의정을 그만 두고 내려와 살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오리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청백리 오리 대감은 두 칸짜리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분이 하도 초라하고 궁색하여 영의정을 지낸 사람인지도 몰라봤다.
인조 임금이 도승지를 보내 이원익 대감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비가 줄줄 새는 초막집에서 아침 저녁거리조차 걱정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 임금이 탄식을 하면서 기와집을 지어 주었다.

오리동은 이원익 대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어서 ‘영당말(影堂洞)’이라고도 불렀다.
무신 중의 무신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문신 중의 문신은 이원익 대감이다.
오직 나라와 백성 생각뿐이었던 분들이다.

오리 대감의 직계 후손(종손)인 이군(君)은 나에게는 후배가 되는 사람인데 목사님이 되었다.
오리 대감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워 갓 쓰고 도포 차려입고 이곳저곳 다니며 위세할 만도 한데 다 때려치우고 목사님이 되었다.
오리 대감이나 그 후손들이나 청빈DNA가 참으로 남다르다.

청빈한 사람끼리 교감하라는 광명시측의 배려인지 오리동 충현서원 맞은편으로는 기형도 문학관이 생겼다.
29세에 요절한 기형도 시인은 연평도에서 태어났으나 4살 때부터 광명시에서 살았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를 하면서 가난하게 산 시인이다.

청렴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근처에 있어 생각나는 두 분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또는 권력 기관에 재직하면서 청렴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뉴스를 보면 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옛날 관직으로 치면 영의정 근처에도 못갈 위인들이 쥐꼬리만 한 권력을 휘둘러 국정을 농단하거나 비리를 저질러 포토라인에 서서 단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된다.
현직에 있을 때나 퇴임한 이후나 청빈하게 살던 오리 대감은 요즈음 비리를 저지르는 공직자들을 보면 어떤 처분을 내릴까?
‘곤장 1대를 쳐라’고 할까?

지극한 효자인 정조 임금은 부친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부에 현륭원을 만들었다.
임금의 능행이 잦아지자 능지기 관리들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능지기 주제에 임금을 직접 대한다는 이유로 고위직 대감들조차 우습게보았다.
민가를 돌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부렸다. 공짜 술, 강도 짓, 부녀자 겁간을 일삼았다.
관가에서는 능지기들의 행패를 뻔히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임금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끗발’있는 관리였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조심태(趙心泰)라는 사람이 수원부사로 부임했다.
조심태는 대쪽 같은 관리였다.

부임하자마자 행패를 부리는 현륭원 관리들을 붙잡아 들이라고 했다.
능지기들의 위세가 대단하여 10여일이 지나도록 한명도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시원이라는 능지기가 과부를 겁탈하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유시원은 붙잡히고도 여유만만했다. 수원부사 정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부사는 백성과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유시원의 목을 베어 일벌백계를 보여주려고 일단 하옥시켰다.
그런데 일이 꼬여 버렸다. 보고를 받은 정조 임금이 ‘죄질이 별로 중하지 않으니 곤장 1대만 치고 풀어주라.’고 명을 내렸다.
조심태 부사는 고민했다.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곤장 1대는 말도 되지 않는 처분이 아닌가?’
다음 날 조심태 부사는 형틀을 준비시킨 후 곤장을 때릴 옥졸을 불러 귓속말로 오랫동안 지시를 내렸다.
조부사의 명령을 들은 옥졸은 곤장을 치켜들고 형틀에서 10여보를 물러났다가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유시원에게 달려들었다.
유시원은 눈을 질끈 감고 엉덩이에 힘을 있는 대로 주었다.

그러나 옥졸은 곤장을 내려치지 않았다.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릴 듯이 시늉만 낸 것이다.
땀을 흘리던 유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옥졸은 같은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
옥졸은 지쳐버렸다.

유시원 역시 옥졸이 곤장을 때리는 동작을 할 때마다 온몸을 오므렸다가 폈다가 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유시원은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네깟 놈들이 나를 어떻게 감히 때리겠누’ 이때 부사의 은밀한 사인이 떨어졌다.

그 순간 옥졸의 곤장이 유시원의 엉덩이에 날아들었다.
방심하여 희죽거리던 유시원은 곤장 1대에 그대로 까무러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람이 죽어버리자 조정에서 진상 조사를 나왔다.

조사는 해보나 마나였다. 현장에서 곤장 1대 때리는 것을 본 사람이 수없이 많고 옥졸은 분명히 단 1대만 때렸을 뿐이었다.
이후 능지기들의 행패는 사라지고 조부사는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조심태는 나중에 훈련대장 직위까지 승진했다.
청렴하지 못한 공직자들에게 조심태 부사의 ‘곤장 1대’가 필요한 시절이다.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