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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장동민 교수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3-21 15:41

백석대학교 장동민 교수.(사진제공=백석대학교)

광장과 골방

가끔 우리 조국교회의 전락(轉落)과 몇 년 전 숭례문이 파괴되는 모습이 오버랩 되곤 합니다. 저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는 기와들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와르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엄하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주르르 맥없이 흘러내렸었지요. 앞으로 우리 교회가 그렇게 무너져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조국의 교회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무엇일까 늘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영락(零落)의 원인을 "광장과 골방" 이라는 틀로 짚어봅니다.

광장에서 골방으로

첫째 원인으로서 우리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의 활동 무대가 너무 넓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교회 목회에 영 만족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총회장이나 감독회장 한 번쯤 해보아야 하고, 아니면 교단의 한계를 뛰어 넘은 연합단체에서 활동하고 싶고, 기독교 TV에서 설교 한 두 번은 해야 하고, 외국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해야 합니다. 정치인 등 저명한 사회 인사와 함께 활동을 하고 사진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신학자들은 입만 열면 ‘한국교회’ 운운하고, 선교단체들은 저마다 전 세계 교회를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여름만 되면 세계 각국으로 정체불명의 비전트립을 떠납니다.
넓은 무대로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날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지성소에 들어가서 마치 젖먹이가 엄마의 품을 사모하는 것처럼, 여종이 주인의 입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지도자들이 이러한 경건의 기쁨을 맛보아 안다면, 세속이 주는 기쁨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매일 아침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중요인사로 인정받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시간을 사용한다면, 매스컴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좁은 길을 기쁨으로 걷기로 결심하였던 청년 시절의 붉은 마음 한 조각을 간직하려고 노력한다면 죄악의 낙(樂)을 누리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분들은 조국 교회의 보배입니다. 다 잘려간 나무의 밑동이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조국의 교회를 일으키시려 할 때 먼저 이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歷史)의 주인공은 하나님과 만남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기쁨을 절대 세상에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골방에서 광장으로

한국교회의 몰락의 원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번째의 원인과 정반대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의 경건만 강조할 뿐 사회적 정의나 참여와 같은 것을 등한시하였다는 분석입니다. 기도시간을 지키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고 술․담배를 금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데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나 민주화, 빈민 운동, 한반도 평화와 통일, 환경 운동 등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일이 없다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비난 가운데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사회 정의에 대하여 그 인식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경의 이해와 해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 너무 개인적인 경건에 무게를 두고 읽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책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강단에서 설교할 때 성경의 말씀에 나타난 사회적 함의에 대하여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 혹은 언급한다 해도 지극히 단편적인 지식에 근거한 극우적인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큐티를 하는 성도들도 대체로 목사님의 성경해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성향을 가질 것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봅시다. 르호보암 때 남북이 갈라지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왕상 12장을 보십시다. 큐티하시는 분들에게 이 본문을 읽고 얻은 교훈을 찾으라 하면, 대체로 "왕이 친절한 말을 하지 않고 포학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다. 나는 오늘 내 주위의 이웃들에게 친절한 말을 해야겠다." 아니면 "르호보암이 나이가 많은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다. 나는 친구의 꼬임에 빠지기보다 경건한 우리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야겠다."는 취지로 자신을 돌아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좀 더 넓게 그리고 자세히 보십시다. 이스라엘 남북분열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물론 르호보암의 권력욕에서 비롯한 미련한 대답(왕상12:10)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열의 원인(遠因)으로서, 르호보암의 선왕(先王)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왕상11:32-38)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에게 와서 무엇을 요구했는지, 또한 왜 유다지파와 그 나머지 지파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는지를 좀 더 숙고해 보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토목공사에 소용될 많은 세금과 부역을 거두기 위하여 지방장관을 임명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각 지파의 장로들이 재판과 행정을 담당했었는데, 솔로몬 때에 와서 중앙정부가 강해지면서 관리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 관리 가운데 두 사람은 솔로몬의 사위였지요(왕상4:7-19). 이 열 두 행정구역 중에서 유다는 빠져 있었는데, 이는 다른 곳에서는 세금을 거두었지만 유다에서는 거두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자연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갔지만 솔로몬은 그 목소리를 듣지 않고 ‘채찍’으로 응징하였습니다.
솔로몬의 학정에 반대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 여로보암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지파 출신인데, 에브라임 지파는 아주 오랫동안 유다지파와 쌍벽을 이루며 이스라엘의 권력을 주도해 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여로보암은 반란에 실패하자 애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애굽은 솔로몬을 반대하여 망명한 정객들의 피난처였습니다.(왕상11:18-19; 11:40) 애굽의 왕은 솔로몬에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줄만큼 절친한 사이였지만, 솔로몬의 대적자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통로인 이스라엘에 자신들의 수비대를 둠으로써 상권을 확보하려는 인접 강대국 애굽의 패권주의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경우도 그의 종교적 편력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주변국과의 야합의 관계를 통하여 안정을 꾀하려는 정략의 종교적 표현이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남북분열의 배후에 이런 복잡한 얽혀 있었습니다. 남북분열이 이런 과정을 겪었으니 남북통일은 그 역순을 밟아야 할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쳤던 우상철폐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은,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 것, 정의를 시행할 것, 민족의 단결, 왕과 귀족의 기득권 포기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결단의 촉구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일 나타난 예언자들은 남북의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통일 방안을 우리 민족의 통일에 그대로 적용시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자와 매일 골방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좀 더 성경을 넓게 읽고 자세히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결단, 생활에서의 결심은 성경읽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로 보았으면 합니다. 남북분열의 원인과 통일의 방안이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성경은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개인적인 삶이든 사회적인 삶이든) 유일하면서도 충분한 대답을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광장과 골방 사이에서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좁은 골방을 뛰쳐나와 광장에서 외치라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골방에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가지의 지적은 다 옳은 것이고, 둘 다를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광장과 골방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면 좋겠습니까? 사실은 이 둘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을 택하고 어느 한 쪽을 버리는 것이거나 혹은 반반씩 우리의 관심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쪽도 강화되기 마련인 관계입니다.

무슨 이야긴지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광장에 노출된 자신의 죄악을 골방에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는 ‘죄’를 너무 개인적인 데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을 미워하고, 정욕에 빠지고, 남의 것을 탐내어 훔치는 등의 것이 모두 개인적인 죄이지요. 그러나 죄가 가진 사회적 함의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장 개인적인 죄라고 생각되는 음행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마음속에 음욕이 불타올라 죄를 짓기 때문에 개인적인 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개인적이기만 할까요? 얼마 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장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의 추이를 보자면, 음행의 문제가 얼마나 권력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궁정에서 있었던 음행과 이를 은폐하려는 구조와 너무 유사합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악과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모두 개인의 죄에 귀착됩니다. 전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할 수밖에 없게 만든 2008년의 리먼 브라더스로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의 본질은 인간의 탐욕입니다. 모든 죄는 개인적이고 동시에 사회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좋건 싫건 광장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활의 방식대로, 어렸을 적부터 길들여져 온 습관대로 별 생각 없이 살아가지요. 수많은 사람들과 이익을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면서 갈등도 많이 겪습니다. 많은 경우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난합니다. 때로 그 문제가 아주 심각해져서 나나 상대방의 어느 한 쪽이 큰 피해를 입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드러났을 때가 바로 그 문제를 골방으로 가져와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태도와 그 배경에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원칙에 위배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탕에서 내가 지금까지 말하고 행하였던 모든 것이 편견과 죄악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때로는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옳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건 책을 읽거나 논쟁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편견이라는 벽은 의외로 두껍기 때문에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깨지지 않습니다. 골방에서 우리의 마음은 단단한 돌이 아닌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둘째, 골방에서 얻은 자기 성찰의 지혜로서 광장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통일되는 것입니다.(엡1:10) 그의 뜻이 골방에서나 혹은 교회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터프한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군(聖君) 다윗의 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내밀한 만남입니다. 물론 최초의 만남은 광야에서 양을 칠 때에 지속적으로 가졌지요.(삼상17:34-37) 사울의 박해를 피하여 광야를 헤맬 때도 그는 늘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를 찬양하였습니다.(예. 시57편)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였고,(삼하6-7장) 실제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젖먹이와 같은 평온을 느꼈습니다.(예. 시131편) 자 이 다윗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얻은 지혜와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쳤습니다. 골리앗을 비롯한 원수들과 전쟁을 하였고, 위기로부터 탈출하였습니다. 그가 왕이 되어 다스릴 때 그는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습니다.(삼하8:15) 그가 당면하였던 몇 번의 어려운 재판에서 그는 하나님이나 가지셨을 법한 지혜와 사랑을 보여줍니다.(삼하12:1-6; 14:4-11)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궁중 생활에서 그는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이를 나눌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기 바랍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1)

셋째, 광장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골방에서 치유하며 또한 골방에서 얻은 용기를 가지고 광장의 악과 맞서야 합니다. 광장은 터프한 곳입니다. 그곳은 비인간적 입시교육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학교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방황하는 수만 명 부적응 청소년이 있는 곳입니다. 일정한 직업도 집도 배경도 미래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이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40대 이른 나이에 해직을 당하여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인 가장들의 슬픔이 있는 곳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갓 10대를 벗어난 연예인들을 성노리개로 삼고자 하는 구조가 있는 곳입니다. 뇌물과 부조리의 고리가 치밀하게 짜여 진 곳입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온갖 비리와 거짓을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곳입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권력집단이 갈등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병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곳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혐오와 차별이 맨얼굴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드러내 놓고 전쟁을 말하며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위험인물로 지목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거룩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매우 심한 고통을 수반할 것입니다. 반드시 육신과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광장에서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은 치료받을 것도 없습니다. 때로 너무 작은 상처를 받은 후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기독교인들도 봅니다만. 이 상처를 어디에서 치유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오락을 통하여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짧지만 빛나는 기쁨의 순간은 하나님이 주신 값진 휴식입니다.(전9:9) 그러나 이 모든 기쁨은 임시적인 것일 뿐 궁극적인 치유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와 위로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사람은 매 순간 좌절의 경험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면서도 그의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용기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광장의 구조’와 ‘골방의 내용’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빛을 발합니다. 외형에 치우쳐 내면의 깊은 영성이 부족하지도 않고, 내면에 치우쳐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삶의 정황을 무시하지도 않는 균형 잡힌 영성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묵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르지도 않고, 또 거시적인 구조를 바꾸는 수단으로 전락하지도 않는, 우리 개인의 삶과 나아가서는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인도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성경묵상과 같은 영적인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충실히 받는 은혜가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장동민의 홈페이지 "오늘의 교회와 신학" (dmchang.net)에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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