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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4-03 10:18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마가복음 14:1-11)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각각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1. 해서는 안 되는 일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째, 죽이려는 사람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냥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속임수를 써서까지 죽이려고 했다.

(막 14:1, 새번역)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속임수까지 써서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가장 악한 짓이 된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속임수를 써서 죽이려 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가장 악한 짓이므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짓을 법을 다루거나 공권력을 가진 자들이 한다면
최악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루 빨리 그런 세상에서 벗어나길 소원한다. 

둘째, 가룟 유다

가슴이 쓰린다.
주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악한 의도에 
가룟 유다가 동참을 하게 된 것이다.

(막 14:10-11, 새번역)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작당을 하고 
돈을 받고 주님을 넘겨줄 기회를 노렸다. 

슬프고 아픈 장면이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자기 이익이 위협당해서도 아니었고 
자신과 걸어가는 길이 달라서 이런 짓을 한 것일 텐데,
주님은 자신의 길을 가시는 것이지만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는 점이 안타깝다.

누군가는 죽이려 하는 것은, 또는 죽이는 것은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셋째, 화를 내는 사람들

(막 11:4-5, 새번역)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였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 장면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화를 내고 여자를 나무랐다.

그들은 왜 화를 내었을까?
그걸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있었겠다는 건
그들의 핑계에 불과하다.

다른 이유는 다 제쳐두고서라도 
남의 향유를 가지고 자기들이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은 월권이요 교만이었다. 

그들은 그 돈이 아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주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악하고 패역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화를 낸 것은 
자신들의 마음의 악함을 드러낸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것,
그 악한 의도에 기대어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며 그 짓에 동참하는 것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가장 악한 짓이다.

게다가 누군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이래라 저래라 훈수 두는 짓도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짓이다.

2. 할 수 있는 일

주님이 여인을 변호하셨다.
어떤 말로 변호하셨을까?

(막 14:8, 새번역)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라고,
이 여인이 주님의 장례를 위해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변호해주셨다.

제법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이 말한다.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느냐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히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고 
그래서 돕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을 남에게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넘은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소중히 여기는 일이 있고
그 가치관에 따라 각자가 
옳고 좋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면 된다.

악한 마음으로 악한 짓을 하는 것만 아니면 된다. 
사람은 선한 의도와 마음으로 
각각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각각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 
그 갈급한 마음과 선한 의도와 
또는 따뜻한 마음에 따라서 
주님은 변호해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것이다.

3. 해야 할 일

그럼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알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꼭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왜 없겠는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하다.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 
형제로서,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등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고 매달린다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늘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만
정작 집중해야 할 일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사람다운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해야 할 일만 하는 삶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그 정도만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의무 사항을 턱없이 많이 만든 사람들이 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다. 
율법 외에도 600가지 이상의 '해야 할' 목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옥죄었다.

사람들은 그 '해야 할 일'들에 치여서 
늘 스스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죄책감 때문에 
더 종교적인 행위와 헌금에 집착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그 '해야 할 일'의 
껍데기만 지키는 척 하면서 
백성들의 죄책감으로 인해 내는 헌금을 
착복하면서 부자가 되어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도 
충분히 해야 할 일은 많이 있다.
그런데 종교적인 면에서까지 
일상보다 더 많은 '해야 할 일'을 만들어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죄악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일상에 꼭 필요한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머지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죽어가는 내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아픈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나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갈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등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힘이 닿는 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나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담담히 해나가는 사람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건 그냥 두면 될 일이다.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그를 위해 변호까지 해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에만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행복하게 감당해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하리라.

4. 나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기독교계가 시끄럽다.
정부가 교회를 박해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억이 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이런 때에 나는 우리 교인들이 자랑스럽다.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을 때
한 마음으로 예배를 온라인으로 돌리자고 하셨고 
적은 금액이지만 어려운 처지에 처한 분들께
조금의 도움을 드리는 데 모두 동의해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인 나였다.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 상황에 대해서 
목사인 나는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를 고민했다.

성도들을 개인적으로 찾아다녀야 하나?
예배는 교회에 가서 드리고 
그 내용을 방송으로 송출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간단하게 마음을 정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였다. 

집에서 온라인 실시간 방송을 할 수 있도록
간단히 장비를 구비했다.
감사하게도 때맞춰서 알고 지내는 목사님이 
실시간 방송하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어서
실시간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 때를 위해서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이렇게 구석구석 잘 되는 것인가 싶었다.
5주 예배를 드리면서 
매주일 온라인 예배에 대해서 조금씩 더 익숙해져갔다.

그리고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도들의 나눔도 어설프게나마
진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도들이 보고 싶어서 
그저께는 교회로 가서 성도님 세분을 만났다. 
온라인으로 예배하니까 
오히려 더 나은 면도 많다는 말씀을 하셨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예배하면 되니까 
무리하게 서둘러서 현장예배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면 하고 말씀을 하셨다.

목사인 나는 솔직히 약간 초조한 마음이 있었는데
성도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묵상 세미나를 했다.
감격적이었다.
거의 현장 강의 만큼이나 
강의하는 나도 은혜가 되었다.

휠체어 타시는 장애우의 고백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이런 기회주신것 너무 감사해요 제가 휠체어타고 다니니까 세미나 가고싶어도 제약이 많더라구요.ㅠㅠㅠ 이런 활동을 장애인도 많이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 세미나를 진행한 것인데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물이 울컥 하고 올라왔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온라인 세미나에 참석해주셨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 되니까
말씀에 더 갈급해지신 것 같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절감하시고 
세미나에 참석을 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 19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에서 
목사로서 의례껏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로 
눈을 돌리니 이렇게 의미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부족한 목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 
이 코로나 19라는 상황이 
말씀에 삶을 거는 분들이 많이 일어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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