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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새생명교회 조태성 목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4-21 09:09

영목신학원 조태성 교수.(사진제공=새생명교회)


*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음성듣기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1.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도 잘 안된다고 말한다. 조금 노력하다가 금방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런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어져 있다.”

이렇게 오해한다. 좌절감을 느끼거나 포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 참 공감이 되는 말씀을 들었다.

2.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방송 전파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싶다면 나의 라디오를 튜너로 주파수를 잘 조정하여 맞추면 된다. 당신이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절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방송국의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는 당신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때때로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들었다 말았다 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파에 지속적으로 자신을 맞추지 못하였다.”

3. 
정말 그렇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나의 영적인 귀가 닫혀있으면 들을 수 없다. 내가 다른 데 정신 팔려 있어도 그분의 음성을 듣기란 참 어렵다. 우리 큰 딸은 감성적이며 좋아하는 일에 꽂히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아내가 함께 식사하다가 옆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한별아~ 한별아??”

“......”

“한별아아~~”

처음엔 부드럽게 부르지만 옆에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정신 팔려 있으면 소리 지른다. 문제는 여러 번 불러도 그녀에게는 안 들린다는 거다. 나중에 큰 소리로 한별이를 부르면 ‘왜 그렇게 내 이름 크게 부를까?’라는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본다.

4.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행 10:19)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행 11:1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 13:2)

말씀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도들과 제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했음을 증언하신다. 기독교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도 음성을 듣고 순종했음을 간증하신다. 오늘날에도 많은 분들이 그런 간증들을 간직하고 계신다.

5. 
다만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성령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전달되는 방식에 있어서 그 방법들이 다양함을 아는 것이 지혜다. 성령님의 음성은 마치 일곱 빛깔 무지개 같이 다채롭다. (분별도 정말 중요한데 다른 글에서 나누고 있어서 참고를 부탁드린다.)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방법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영적 권위를 두신 목회자의 설교와 목회자의 권면, 상담을 통해 말씀하신다. 꿈과 환상으로도 말씀하신다. 크고 작은 세미한 음성과 감동, 생각으로도 말씀하신다. 가족과 친구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스쳐지나가는 어린 아이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뉴스에 보도되는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각종 신문 방송 매체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길가에 핀 들풀, 들꽃 하나,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이 외에도 너무나 다양한 방법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6. 
그러나 그분의 음성이나 인도하심을 오해하면 안 된다. 신비주의나 결정 장애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조종당하고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세는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기복신앙내지는 스토킹이다.

우리에게 성령님의 다양하신 종류의 음성들을 전달해주시는 이유는 생명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다. 동일하신 사랑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자연스레 반응하는 것이 그분의 음성 듣기다. 그분을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존중해드린다는 의미로 연습하며 훈련하는 것이다.

7.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격적이신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과 훈련이다. 크고도 세미하며 다양하신 성령님의 음성이 성령님의 음성임을 알아채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성령님의 작은 인도하심에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임을 알아채는 연습과 훈련이 너무나 필요하다. 성령님에 대한 영적인 민감함, 영적인 예민함, 영적인 순발력과 기민함 등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께서 친밀하고도 인격적으로 인도하심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8. 
평소에 성령님의 음성을 인격적인 관계에서 누리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중요한 사역 현장에서 그분의 다양하신 음성을 알아채고 인도하심 받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평소에 그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하지 않으면서 사역 할 때만 성령님을 찾는 것처럼 그분께 무례한 행동과 태도가 또 어디 있는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도 마찬가지다. 사역이 힘들고 결정 장애가 있을 때만 기도로 여쭤보고 음성 들으려 하거나 인도하심 부탁드린다면 무례한 것 아닐까? 

다양한 방법으로 음성 듣는 삶도 평상시에 추구하고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사역가운데 긴장감 넘치며 당혹스러운 일이 발생해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분의 인도하심을 듣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 
인도하심이 있을 때마다 나누고자 하는 내용들 중에는 바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단순히 큰 문제에 대해 기도하고 응답받는 이야기를 넘어선다. 나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얼마나 크신 사랑과 애정을 가지시고 계신지를 나누고 싶다.

성령님께서 얼마나 인격적이신 분이신지 나누기를 원한다. 우리에게 어떻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며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나누고 싶다. 성령님과의 인격적이고도 친밀한 교제라는 영적우선순위를 회복한 사람들을 더 잘 사용하실 수 있으심을 나누고 싶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러한 성령님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영적우선순위가 회복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나누기를 소망한다.

10. 
그럼에도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스스로 영광을 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성령님을 존중해드릴수록, 의지할수록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신다. 성령님을 존중해드릴수록 예수님께서 주목받게 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나게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이것이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이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성령님의 이러한 본질적이신 사역이 우리 삶과 사역에서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성령님의 음성 듣기가 기복적이거나 광신적인 수단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경험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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