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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하늘의기쁨교회 양봉식 목사,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5-24 20:13

고양 하늘의기쁨교회 양봉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었을 때, 사람은 육신을 입은 영적인 존재였다. 땅에 살지만 영으로써 하나님과 연합한 존재이다. 타락하지 않은 인간은 영으로는 하나님과 연합하였으며 육으로는 이 땅과 연합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영인 존재가 땅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영적 존재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다. 이 땅은 물리적 공간이지 영적 공간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에서 영적인 공간을 인식할 수 없다. 영의 세계 접촉하며 사는 육신을 입은 사람만이 영의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 땅에 나타낼 수 있다.

이 땅의 통치방식은 육신을 입은 영적 존재인 사람에 의해서이다. 영적 존재인 사람은 자신의  뜻을 따라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나타내는 것이다.

영의 세계는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숨겨질 수 없고 오직 빛의 가득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물리적 감각으로는 알 수 없다. 오직 영으로만 인식하고 반응하는 세계이다. 영은 오감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을 인식하는 방법은 그분이 우리에게 두신 성경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말이 영이자 생명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두신 것이 믿음이다. 영의 세계와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방식은 말씀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삶이다. 그분이 그러면 그렇다고 믿는 방식을 우리에게 두신 것이다. 아담은 이 방식보다 자신의 감각을 더 믿는 방식을 택했다. 육신을 더 신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다음에도 여전히 이 육신적인 방식으로 살려고 한다.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이유는 구원은 십자가이지만 삶을 십자가 방식으로 살면 구차해 보이고 미련해 보이기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모든 삶의 방식은 십자가의 방식이다. 자기의 생명을 죽이는 십자가의 방식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방식이다.

십자가의 방식은 철저하게 육신적인 것을 거절한다. 육신적인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혜는 뭔가를 이뤄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국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가 맺힌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지적하지만 이런 상황은 여전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포도를 맺은 행위의 대표적인 것이 탐욕과 쾌락과 거짓, 교만과 도덕적 부패, 옳고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들과 상관이 없고 또 나와도 상관이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이런 모습에 내 삶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들포도를 맺게 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이유가 이사야 5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5:12)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안위와 쾌락에만 몰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다. 그 결과로 그들이 들포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사 5:24)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고 말씀을 떠나는 일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들포도가 열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탐욕 때문이다. 탐욕이라는 것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것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세상이 사람들은 더 넓고 괜찮은 저택과 많은 토지를 갖고 싶어한다. 마치 여기가 영원히 살 곳처럼 생각하고 땅에 쌓고 더 큰 창고를 짓고 그 창고에 채우려는 어리석은 부자의 삶을 추구한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이 구절을 두고 어떤 목회자는 아파트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아파트가 없었던 중세 시대의 성도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지 말고 보류해야 한다. 오직 아파트가 등장하는 세대의 성도들 위한 성경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모든 성경은 모두 세대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라는 구절은 아파트가 아니라 탐욕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땅의 것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탐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볼 필요가 있다. 그분은 자신의 사명과 정체성을 성령님을 통해 또한 성경을 묵상함을 통해 계시를 받으셨으며 성령님의 기름 부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영적 존재라는 것을 아셨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라는 의식이 뚜렷했다. 

그분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런 삶은 이방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그분은 공생애 사역을 돈이 적고 많음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좋은 건물을 세우는데 고민을 하지 않으셨다. 토지를 사들이거나 장래를 위한 저축하지 않으셨다. 물론 노년의 삶을 살지 않으셨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노년을 살기 위해 걱정할 이유는 없다. 그 이유는 성경이 염려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있는 나누어주셨는데, 그것은 성령님이 능력이었다. 열두 제자들은 능력을 가지고 나가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였다.

삶은 비관적이거나 혹은 현실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욕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욕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욕구를 어디에 순종시키느냐이다. 탐욕 역시 욕구의 소속은 맞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탐욕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탐욕이다. 그분을 목말라 하고 그분이 주는 생명수를 탐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님께 사로잡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추구했다. 하나님을 알면 전부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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