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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부유함의 대표도 망할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8-10 22:55

말씀의빛교회 운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부유함의 대표'도 망할까?]

(이사야 23장)

힘의 상징이던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심판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분명히 예언했고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도저히 망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힘과 권력의 강함이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힘과 권력만큼이나 강력한 '부'는 망할까, 영원할까?

1. 부의 상징인 나라

부의 상징인 나라가 있었다.
두로와 시돈이었다.
남과 북에 좋은 항구가 있었던 두로와 시돈은
일찍부터 바다로 나가서 지중해의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엄청난 부와 번영을 누렸다.

게다가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근동을 장악했을 때에도 
바다와 바위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두로는
철벽같은 방어로 끝까지 자신을 지켰던 나라다.

그랬던 그 나라는 심판을 면하고 안전했을까?

(사 23:1-4, 새번역) [1] 이것은 두로를 두고 하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울어라. 두로가 파멸되었으니, 들어갈 집도 없고, 닻을 내릴 항구도 없다. 키프로스에서 너희가 이 소식을 들었다. [2] 항해자들이 부유하게 만들어 준 너희 섬 백성들아, 시돈의 상인들아, 잠잠하여라! [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수확을 배로 실어 들였으니, 두로는 곧 뭇 나라의 시장이 되었다. [4] 그러나 너 시돈아, 너 바다의 요새야, 네가 수치를 당하였다. 너의 어머니인 바다가 너를 버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산고를 겪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못하였다. 아들들을 기른 일도 없고, 딸들을 키운 일도 없다."

부의 상징이었던 두로와 시돈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이사야를 통하여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바빌론의 엄청난 힘과 권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인간이 이룬 최고의 부와 영화와 
심지어 어떤 공격도 막아 버린 천혜의 요새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부의 상징이었던 두로와 시돈은 왜 망한 것일까?
부는 망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두로와 시돈이 망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2. 부의 상징인 나라가 망한 이유

이사야의 본문에는 부의 상징이었던 두로와 시돈이
왜 심판을 받고 망하는 것인지 
분명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연결된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가 제법 명확해진다.

두로-시돈의 '엣바알'이라는 왕이 있었다.
이름에 '바알'이 들어가 있는 것에서 짐작이 가능하듯
바알의 제사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 왕조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조와 동맹을 맺었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 왕에게 아내로 주었다.
정략 결혼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 이후에 이세벨은 온 이스라엘을 바알의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의 곳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순식간에 바알의 곳이 되어버린 원인이
이세벨이었고 엣바알이었고 두로와 시돈이었다.

풍요와 다산의 신, 즉 부의 신인 바알을 
주된 신으로 삼았던 두로와 시돈은,
그들이 섬긴 신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온통 부를 획득하는 것에 집중했고
남부럽지 않은 부를 획득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가 가져다 주는 사치와 향락을 거부할 수 없었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마저 바알의 곳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버리고 부와 욕망을 좇아가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로와 시돈을 심판할 수밖에 없으셨다. 

힘과 권력과 부만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공의의 잣대로 각 개인과 나라들을 심판하신다.

힘과 권력과 부를 위해서만
삶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삶의 방향이 될 것이다.

3. 돈의 흐름은 어디로 갈까?

두로는 심판받을 것이지만
70년 후에 다시 회복될 것이다.

(사 23:17, 새번역) 칠십 년이 지나가면, 주님께서 두로를 돌보아 주셔서 옛날처럼 다시 해상무역을 하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두로는 다시 제 몸을 팔아서, 땅 위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의 돈을 끌어들일 것이다.

바알을 섬기면서 부를 획득하고 
풍요와 다산을 신으로 섬겼던 나라는
영원히 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 나라가 다시 회복되는 것일까?
그 나라의 회복에는 물리적인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리적 개념을 뛰어넘어 
완전히 새로운 이유를 말씀해주신다.

(사 23:18, 새번역) 그러나 두로가 장사를 해서 벌어들인 소득은 주님의 몫이 될 것이다. 두로가 제 몫으로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못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두로가 벌어 놓은 것으로, 배불리 먹을 양식과 좋은 옷감을 살 것이다.

놀랍게도 두로가 벌어들인 소득이 주님의 몫이 될 것이고,
그들의 수입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먹을 양식과 옷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으니
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두로의 부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갈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응한다.

결국 돈의 흐름도 하나님이 제어하신다.
하나님께서 돈이 어디로 향하게 하실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힘과 권력과 부가 목표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힘과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던 나라들이 
모조리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른 나라들이 얻은 부를
하나님의 사람의 필요를 위해 흘러가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는
부를 추구해선 안 됨을 선명하게 말씀해주고 계신다.

힘과 부를 추구하면 망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돈이 있도록 
돈의 흐름을 조정하실 것임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4.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큰 돈을 벌어 보란 듯이 살아가고 
그 돈으로 주의 일도 크게 하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도 돕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를 목표로 미친듯이 일했다.
낮에도 밤에도 수업하고 또 수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돈을 벌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느새 마음에서 돈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었다.

돈이 벌리지 않으면 초조했고 
돈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 불안했고 
불안과 초조가 생길수록 
더 많은 일을 하려고 미친 듯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너덜너덜해지고 삭막하고 메말라버린
나의 처절할 내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차려졌다.

이대로 살다가는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이 되겠다 싶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돈만을 목표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신자로 다시 살아나고 싶었다.

말씀이 주는 생명력으로 내면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나의 내면을 치유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교인들이 보였다.
나와 비슷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 
부를 획득하기 위해 미친듯 달려가고 있는 교인들,
그래서 서로 무슨 집에 사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나눔이 없거나
형식적 나눔에 그치는 교인들의 만남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신자의 삶은 저런 것이 아닌데 싶어서 
말씀으로 사역을 하고 싶었다.
집사의 신분으로 말씀묵상 세미나를 하고 
묵상 나눔 모임도 하고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도 하면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 말씀 사역을 조금씩 해나갔다.

물론 목사님이나 교회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가면서 했고
나중에는 저절로 그런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했다.
살 것 같았다.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었다.

신자로서 신자답게 살아가는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과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함께 말씀에 삶을 거는 방향으로 가는 신자들이 있어야
서로 힘을 주고 받으면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야겠다 생각한 것은
나도 살고 신자들도 함께 살기 위해서
말씀 사역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하고 싶어서였다.

학원 운영하면서 이중직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교회는 학원의 교실 한칸이었다.
그 때만 해도 끝까지 이중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기도,
게다가 나도 처음 들었던 지역인 동탄, 병점에서 
교회 간판도 없이 학원 교실 한 칸의 교회의 목회자가 
어떻게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겠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든지 말든지 그게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주께서 보내주시는 분들을 말씀의 사람이 되로록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그 과정 중에 나도 더 깊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이
내가 관심을 가진 유일한 일이었다.

환경을 탓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마음 빼앗기고
안 된다고 절망하고 좌절하기에는
나의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신천지로 오해받으면서 성도 한 명을 잃고,
내가 한 설교를 오해한 자존감이 낮은 부부가 교회를 떠나기도 했고,
이상한 전도사가 교회를 헤집기도 했고,
교인들이 나를 오해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은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 때는 교회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한 가지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아니,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
나의 모든 사역을 말씀에 집중하는 것,
말씀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남은 성도 3명과 함께
용인의 한 연기학원 공간에서 예배할 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이 분들과 함께 또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일 아침에 아내와 일찍 가서 
거의 1시간에 걸쳐서 의자 배열하고 프로젝터 설치하고 
거울을 스크린으로 가리면서 예배 준비를 했다.

그래도 연기학원으로 디자인된 공간이었기에
교회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어설프고 초라한 예배당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그 어설픈 공간에 한 부부가 찾아와서 
교인이 되어주셨다.
말씀 하나에 집중하는 그 가치에 동의하셔서였다.
당시에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분들과 연결이 되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참으로 간절히 몸부림치며 걸어가는 분들이었다.

그렇게 만난 분들과 함께 지금의 서울 천호동에서
말씀의빛교회를 이루었다. 

매주 드렸던 그 기업의 예배에서 설교를 하면서
조금씩이지만 그 기업의 속사정을 알아갔다.
사업을 하면서 부를 목적 삼지 않는 이상한 기업이었다.

계속 적자가 나는데도 
그 불안을 안고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셨다.

그저 돈만 목적 삼는다면 기업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상한 분들이었다.
그 기업의 상황은 어려을 때가 많았다. 
한 고비를 넘겼는가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오고
그 고비를 겨우 해결했는가 싶으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는
그 끝없는 상황을 보면서 
나는 거의 처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기업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업을 운영하려고 
부정과 부패와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이지 않냐고,
이런 기업을 살리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삐질 것이라고 
거의 협박 비슷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기업이 드디어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너무 감사했다.
감사의 이유는 기업이 잘 되어서도 아니고 
기업에 돈이 많아져서도 아니다.

사장이신 집사님 부부는 거의 매일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셨다.
그 바쁜 사업의 현장을 치열하게 살아가시면서 
아침 저녁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바는
바로바로 실천하셨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기업의 예배와,
매일 직원들이 말씀을 묵상하던 시간을 없애셨다.

불신자도 있는 직장의 상황에서 
비록 업무시간 안에서 하는 예배와 묵상 시간이었지만
그것도 불편할 직원이 있겠다 싶어서였다.
의도치 않게 종교적 강요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모든 종교적 행위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셨다.

내가 조언을 드린 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하신 것은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올바른 관점으로 말씀을 묵상하셨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사업을 하면서 돈이나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기업을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는 것을 목적 삼은 결과가
사업이 망하는 것이라면,
사업의 영역은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가치대로 살고 
말씀의 가치대로 기업을 이끌어가셨는데,
드디어 기업이 적자를 면하는 시점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사업의 영역도, 돈의 흐름의 영역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임이 이렇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자고 하면
'당신은 목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줄 알아요? 순진하긴...'
정도로 생각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학원 강사로 살아갔던 시절에
많이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목사니까 말씀에 삶을 걸고 산다지만,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성도도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삶을 책임지심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일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사업이라는 영역 속을 살아가시는 집사님 부부를 통해서 
이렇게 증명해 주신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돈의 흐름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으로 보이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임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말씀에 삶을 거는 주의 백성들의 삶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심을
이렇게 또 한 영역에서 보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말씀에 삶을 거는 신자들의 삶의 각 영역에서 
이런 간증들이 하나 하나 나와서 
말씀에 삶을 거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임이 
더 선명하게 증명되길,
그래서 말씀에 삶을 거는 신자들이 한분 한분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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