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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용서의 세 가지 근거'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9-26 01:09

말씀의빛교회 운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용서의 세 가지 근거]

(창세기 50:15-26)

1. 요셉 형들의 불안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그 잘못이 크면 클수록 용서는 어렵다. 

야곱의 장례식이 끝났다.
요셉의 형들은 불안했다.
요셉은 대제국의 총리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졌고 
자신들은 과거에 요셉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요셉을 팔아 넘겼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까지 안 계시니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용서가 쉽지 않다는 일반적인 개념과 
어쩌면 실제로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고
용서를 해본적도 없는 그들의 경험에 근거한 불안이었으리라.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용서한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용서했다.
형들의 불안은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해서 생긴 
어리석은 불안에 불과했던 것이다.

2. 용서의 세 가지 근거

요셉은 왜 용서할 수 있었을까?
이 용서는 분명 쉽지 않았다.
살려달라는 자신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려 하고 인신매매해 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어찌 쉽게 잊혀질 수 있으며
쉽게 용서가 될 수 있을까?

그 정도면 사실 평생 이를 갈고 살아가도 마땅하게 여겨진다.
심지어 그 분노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도록 살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그 용서의 세 가지 근거를 생각해 본다. 

1) 첫 번째 근거 

(창 50:19, 새번역)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용서의 첫 번째 근거는 심판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믿는 마음이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복수를 하는 것은 
형들이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가 될 수 있음을 
요셉이 알았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이다.

'복수'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결코 사람이 할 일이 아님을 요셉은 알았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용서의 근거와 비결이 되었다.

2) 두 번째 근거

(창 50:20, 새번역)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용서는 결단과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해야지'라고 결심하면 할수록 
사실 용서는 더 안 된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될 때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려면 상대방이나 용서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해야 한다.

나에게 죄를 지은 상대방이나, 
용서 자체에 대한 생각 자체를 뒤로 미뤄두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가는 것이
용서의 비결과 근거가 된다.

3) 세 번째 근거

(창 50:25, 새번역)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일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날이 온다.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 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

요셉도 죽는다.
죽음 앞에 서면 그 기록이 아무리 짧아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유언했다.
왜 그랬을까?
요셉의 관심이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요셉은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을 알았고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요셉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아프고 슬프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임을 알기에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용서의 세 번째 근거는 
자신의 생명이 유한함을 아는 것이고,
삶이 끝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실제로 용서가 가능할까?

원수 갚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인생이 유한하고 결국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는 것임을 알면 
용서할 수 있음을 요셉을 통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야 그 세 가지를 알고 
마음에 새겨서 실제로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원수 갚는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실제로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게 되면
원수를 갚지 않는 것이 더 힘든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도 
그것과 별개로 복수할 수도 있고,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죽기 전에 복수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실제로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를 '아는 것'이 용서의 근거인데,
'안다'라는 말은 지식적인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다 포함된 말이다.
안다는 말은 실제로 자신의 삶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바르게 알면 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지식적인 앎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전인격적인 앎, 
지, 정, 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앎,
그래서 삶으로 나타나는 앎이 될 수 있을까?

다른 길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그 방법 중에서 
최고의 길이라 믿는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이 지식에서 머무는 상태에서 끝나지 않고 
감정을 건드릴 때까지 생각하고 읖조리는 것을 말하고,
그렇게 지식과 감정을 거친 말씀이 
실제 나의 삶을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말씀을 적용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어느새 말씀이 나의 삶을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을
깨닫고 느끼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말씀은 조금씩 참된 '앎'이 되고 
참된 앎이 된 말씀은 실제로 삶을 바꾸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 싶다.

4. 나는?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또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사람을 묵상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어이없음이 
순간순간 마음에서 올라왔지만,
그 때마다 다른 생각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매일 말씀을 묵상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의 내용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말씀을 묵상해 놓고도 
묵상의 내용에 대해서 하루 종일 
수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밀려들 때마다 
그 생각을 아침에 묵상한 말씀으로 돌렸다.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원수같은 그 사람을 더 이상 묵상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그 사람과 관계하지 않지만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 따위는
내 속에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고 살아온 결과,
그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통과해서
오늘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죽음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나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조금씩 몸으로 느껴진다. 

나의 삶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사실이 내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변치않을 사실임을 선명하게 알아간다.

주님 품으로 돌아간 그 날에 
하나님께 무엇이라 말할까?
주님은 나에게 뭐라 말씀하실까?
이 두 가지가 나의 남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용서할지 말지 등에 대해서,
원수를 갚아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아예 관심 자체가 없어진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아내기도 벅찬데
원수 갚는 것 따위에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왜 범하겠는가?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는 모세의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듯 한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가 가르쳐주는 듯 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노년까지 살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하면 살아야 할까?
마음에 분명한 기준이 생겼다.

노년이 될 때까지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다가,
노년이 되면 말씀에 더 삶을 걸려고 한다.
그리고 말씀묵상에 삶을 거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겸허하고 조용하게 전하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복된 노년이 될 것 같다.

용서할 수 없는 소심한 성격의 사람인 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용서를 하면서 살아가는
기적같은 삶을 선물해준 것은 바로 말씀이다.

이 소중한 말씀에 나의 삶을 걸고 
하루하루 담담히 살아가다가 
나에게 주어진 삶이 다하는 그 어느 날에
주님 품에 조용히 안기는 인생이길 소망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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