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25일 목요일
뉴스홈 사회/사건/사고
순천·여수·광양시, 학술대회 통해 왜교성전투 역사 바로잡아야

[광주전남=아시아뉴스통신] 양도월기자 송고시간 2020-10-04 13:34

-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는 광양만 해전 순천왜교성 전투
- 순천왜교성에서 시작된 전투가 광양만 해전으로 확전
- 노량은 왜군이 지나온 길목에 불과하지만, 박정희 정부가 왜곡
- 순천시는 구 충무초등학교 부지의 평화공원 공사를 즉각 중단해야
순천 외교성 -명나라 황실의 종군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정유재란의 마지막 격전지인 순천왜교성의 가치를 모르면서 평화공원, 역사공원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역사 왜곡의 고착화가 될 수가 있어 여러 사료와 그동안 조사한 바를 토대로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의 일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년에 조선을 침입한 일본은 평양성까지 일사천리로 쳐들어왔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그리고 명나라의 지원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 활약으로 보급로가 차단되어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조선을 배제하고 명나라와 강화협정을 진행했으나 격렬 됐다.
 
이에 1597년에 1월 14일 일본은 14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여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후 좌,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쪽으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우리는 이것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그러나 9월 권율·이시언 장군과 조명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 척의 일본 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수륙 양면에서 몰린 일본군은 거점을 확보하고자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축성하고 장기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이때 순천 왜성도 9월부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왜장이 지금의 신성포에 3개월간 축성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쟁포로 및 지역의 수많은 백성이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검단산성은 권율 장군 휘하 군사들이 주둔하고 명나라 유정은 순천부휴현 (창촌)에 주둔하였으며 이순신은 장도의 왜군 포로수용소를 탈환하여 주둔하고, 명나라 수군을 이끄는 진린은 송도와 묘도에 주둔하며 조명연합군과 왜군 약 6만 여명이 이순신이 전사하는 날까지 60여 일간 치열한 전쟁을 지속하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간동안 같은 장소에서 가장 오랜 시간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순천 왜교성 전투인것이다.
 
결국,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본격적인 철수를 준비하였으나 바다 퇴로 길을 이순신의 수군이 막아서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경상도에 주둔한 왜성에 도움을 청하여 결국 사천 진해 남해 인근 왜성의 주력부대들이 고립된 고니시유키나가를 돕고자 남해의 좁은 수로 현(남해대교)노량을 지나와 광양만에서(현 포스코앞바다와 섬진강하구)진을 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순천 왜성에서 전투를 벌이며 퇴각하는 고니시유키나가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조선과 명나라 수군, 그리고 일본의 수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200여 척을 침몰시키고 고작 50여 척이 퇴각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이를 끝까지 뒤쫓다 적의 흉탄에 사망하게 되고 또한 명나라 장군의 등자룡도 전사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명량해전과 같은 노량해전의 단일 전투가 아닌 순천 왜교성전투에서 시작된 전투가 여수 장도를 거치고 송도 묘도를 거치면서 단 한 명의 왜적을 살려 보내지 않으려는 절박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을 우리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지난 박정희 정부에서 아산 현충사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순천 왜교성 전투의 역사적 가치를 망각하고 단순히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를 노량해전으로 기록함으로 역사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더군다나 관음포 인근을 지나면서 흉탄에 맞은 사실을 근거로 관음포에 ‘이순신 전몰유허지’까지 만든 남해군의 욕심에 어리등절할 뿐이다.
 
항공사진에서 보듯이 남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으로 바다 가운데 수심이 깊은 곳에서 전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짐작한다면 지도에서 보는 관음포의 좁은 해안보다는 지금은 매립된 포스코 공장 부지가 전투의 중심 격전지란 것이다.
 
광양만해전의 항공사진./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결국,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는 섬진강하구인 광양만 바다가 전투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우린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 장군이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다 전사한 장소도 관음포 좁은 해안이 아닌 여수 묘도 앞바다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
 
해서 지역의 많은 사학자가 노량해전이 아닌 ‘광양만 해전 순천 왜교성 전투’로 역사기록을 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래전부터 하고있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광양만 인근의 여수, 순천, 광양시는 그동안 산업화란 빌미 앞에 무분별한 개발로 역사적 현장을 훼손하고 심지어 전라도 좌수영 수군의 위상까지 훼손한 것이다.
 
전라좌수영은 이순신이 온갖 노력으로 판옥선을 건조하고 거북선을 건조한 것 역시 전라좌수영의 선소였으며 그들 병사 역시 광양 순천 보성 고흥 구례등 인근의 백성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치권의 음해로 원균에게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하는 과정에 오히려 경상 우수사 즉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의 실책으로 칠전량에서 전함 대부분이 침몰하고 수많은 병사마저 잃었으나 다행히도 배설 장군이 12척으로 빠져나와 이를 기반으로 명량해전을 치른 것이다.
 
그 중심에는 우리 전라도 백성들이 있었으며 스스로 나선 의병들과 힘없는 민초들이 전라도 좌수영의 군사이었으며 이들을 독려하여 전쟁을 치른 장군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란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순천시가 주도한 ‘한중일평화공원’ 동상 건립사태는 평화공원이란 용어조차 잘못된 것이며, 더군다나 역사적 재평가 없이 아무리 좋은 시설을 건립한다고 해도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가 지금처럼 노량해전으로 기록되어 있는 현실에 결국 역사공원의 위상도 사라질 것이며 관광객유치도 어려울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량과 관음포가 있는 남해군이 이순신 관련 사업의 정통성마저 가져갈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순천 왜성 인근 폐교된 구 충무초등학교 현재 평화공원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그렇기 때문에 순천시는 현재 진행중인 평화공원사업을 중단하고 이를 계기로 순천 왜교성전투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을 서고 역사적 오류를 정정하는데 광양만권의 여수·순천·광양시가 나서야 할 것이다.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