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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순창의 샘(우물) 이야기_(33) 유등면 오교리 가운데샘

[전북=아시아뉴스통신] 이두현기자 송고시간 2020-11-21 08:00

주민들은 샘을 신성시 여기고 마을에 애·경사가 있을 시 샘을 잘 관리 해
당산제 지낼 때 샘에 금줄 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 통제
추석·설 명절에도 금줄 치고 청소를 깨끗이 한 뒤 샘물로 음식 장만
순창군 유등면 오교리 가운데샘, 원형, 지상 1m, 깊이 2m./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건지산(乾芝山, 412m)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인계면 지산리를 지나면서 순창 남원간 국도가 동서로 지나가는 도로의 잿길 개고개(강도와 맞서 싸우다 죽은 개를 추모하는 견두비를 세웠던 고개)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온 지맥이 서원(서우내)에서 다시 남쪽으로 솟아오른다.

이 산이 해발 180미터 큰 까끔으로 오교리의 주산이다. ‘까끔’은 동산의 방언으로 큰 까끔은 큰 동산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大山으로 불린다. 이 산에서 남쪽으로 구릉을 이루고 내려가니 오교리의 청용동이다. 서남쪽에 오금제와 오금지 등의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산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유등 고뱅이 유원지가 있다. 고뱅이 유원지의 명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뱅이 어살이다. 고뱅이 어살은 조선 중기 때 자연석으로 강을 'V'자 형으로 막아 쌓고 가운데 부분에 물이 지나가도록 한 곳에는 대나무와 발을 엮어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던 물고기들이 잡히도록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형으로 된 마을 이름이 원래는 ‘머드리’였다. 머드리는 머드러기의 방언으로 다른 것들에 비해 굵거나 크다는 말이다. 따라서 큰 마을이란 말로 오교리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한편으로는 마을 중심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오동나무 교량이 있어 오교리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머드리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오교리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교리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부터 오교리 가운데 샘은 존재하였다고 본다. 오교리 가운데샘은 오교리 웃뜸 주민들의 식수요 생활용수로 활용하여 왔기에 가운데 샘의 물의 양도 풍부하여 물 걱정 없이 살아온 오교리 마을이었다.
 
이곳 마을 주민들은 샘을 신성시 여기고 마을에 애사나 경사가 있을 시는 샘을 잘 관리하여 깨끗한 물로 음식을 장만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애사 시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는 우물을 덮고 출상이 끝나면 샘물을 품어내고 깨끗이 청소해서 사용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에는 정월 14일 보름 안 날 마을에 당산제를 지냈는데 이 때가 되면 샘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고 통제했다. 또한 마을 풍물패들이 제일 먼저 샘굿을 치고 지 신 밟기를 실시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의 없어서는 안 될 물의 근원인 샘을 신성시 여겼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찾아 굿을 쳤고 금줄을 쳐 출입을 통제했던 것이다.
 
추석과 설 명절에도 금줄을 치고 청소를 깨끗이 한 뒤에 샘물로 음식을 장만하여 치사를 지내곤 하였다. 가운데 샘은 오교리 2~3개 되는 우물 중 가운데 샘의 식수 인원이 많았고 샘의 물의 양이 제일 많이 솟아올라서 가운데 샘을 제일로 생각하여 왔다.
 
요즘은 상수도 물을 사용하고 있기에 옛날 가운데 샘의 고마움을 잊은 지 오래되어 아쉽다. 소방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옛날과 같이 마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출처. 순창문화원)

[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dhlee3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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