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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은혜의 말씀에 화가 나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10 23:15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은혜의 말씀에 화가 나다]
(누가복음 4:14-30)

1. 좋은 소문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졌고
주님의 가르치심에 사람들이 좋게 반응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눅4:14)/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눅4:15)/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말씀으로 통과하신 결과는 
사람들의 호응이었고 좋은 반응이었다.
주님의 가르치심이 권위있는 교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위있는 교훈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는다.
그들이 그동안 들었던 고리타분하고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면 깊은 곳을 건드리는 생명의 말씀이요,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의외의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은혜의 말씀에 화가 난 이들

그런데 은혜의 말씀에 화가 난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눅4:22)/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눅4:28)/

이 두 구절은 이상하게 보인다.
주님의 가르치심에 감탄을 했는데 화가 난 것이다.
왜 감탄을 했는데 화가 났을까?
주님이 가르치신 내용 때문이다.

주님은 이사야서의 구절을 읽고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눅4:18)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4:19)

이 구절을 인용하시고 
이 구절이 주님 자신에게 임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왜 나사렛 사람들은 화가 난 것일까?
왜 화가 나서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주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에서 힌트를 발견한다.
주님이 읽으신 내용과 이사야서의 본문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사야 61:1-2절을 읽으셨는데, 
이사야 61:2에서 차이가 난다.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사61:2)

이사야서 본문은 '보복의 날' 선언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주님은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까지만 
읽고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방 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이 읽으신 구절에 대한 이해에서 
'보복의 날'이 거의 핵심이었다.

주의 은혜의 날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구절을 쏙 빼버리고 
그 말씀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신 것이다.

이방 나라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야 출현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고 있었는데,
그 소망이 틀렸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고,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생각과 달라서 화가 난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친구 어디가 잘못된 거 아냐? 우리가 좋아하는 본문을 인용하더니 거기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빼버렸네. 그러면서 심판의 본문을 자비의 본문으로 바꿔버리다니, 정말 열받게 하는구먼! 메시야 시대는 우리에게 황금의 시대이고 하나님이 저 원수들을 보복하시는 시대잖아. 이 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어떻게 이걸 모르지?'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에서 인용)

3. 고정관념의 무서움

말씀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말씀에 삶을 걸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 
자신도 그렇다는 분들이 있다.
말씀 하나로만 사역하신다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하다.

그런데 뭔가 아쉬울 때가 많다.
말씀에 삶을 걸고 말씀만으로 사역한다고 하는데,
자신만의 고정관념은 벗어나지 못하고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강화시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서다.

사실 말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또는 말씀으로 사역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자신에 옳다는 확신만 강화되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보이는 시각만 강화된다면
그것은 위험한 상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한다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고정관념이 깨뜨려지는 경험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깨뜨려지는 경험이 한동안 멈추었다면
자신의 신앙이 정체된 것이고,
그 상태를 지속하다가는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말씀 때문에 가장 악한 상태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기 쉽다.
그 사실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하다.

그런데 말씀이 필요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계속 강화하기만 한다면 
그는 최악의 존개가 되고 말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씀을 읽고 묵상하되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음성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는 갈망을 가져야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다윗의 기도를 기억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봐야 한다.
말씀에서 자신을 깨뜨리는 놀라운 것,
자신의 고정관념과 자기 중심성을 박살내는
'놀라운 것'을 만나고 보고 경험하고 누려야 한다.

그 경험이 멈추었다면 은혜의 말씀 때문에 
자기 중심성이 계속 강화되는 무서운 사람이 되어
은혜의 말씀에 화가 나고 
은혜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에게도 화가 나고
결국 주님을 죽이려 하는 무서운 상태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게 된다.

4. 나는?

말씀묵상 세미나를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들었다.
다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세미나에서 
말씀묵상의 원리에 대해 충격적으로 배운 것이 있다.
'의외성'이라는 단어였다.

성령은 말씀에 대해 고리따분하게 해석하도록 하지 않고
의외성을 준다는 말씀이었다.

그 이후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의외성'이라는 개념이 마음에서 잘 떠나지 않았다.
그 의외성이란 이상하고 신기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묵상하는 나에게는 의외의 깨달음이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이후 나의 묵상은 많이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말씀묵상을 하는 자세가
'의외성'을 정리하고 나서 부터 거의 없어진 것 같다.

나는 말씀을 왜 매일 치열하게 묵상할 수 있을까?
어떤 월간지 편집자분이 연락을 주셔서 
글을 써달라고 하셔서 기쁘게 감당했었다.

그런데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글을 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읽도록 글을 쓰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분명 묵상 글과 성격이 비슷한 글인데 
글이 써지지 않아 너무 괴로워서였다.

매일 묵상글을 쓰는 것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이라면 
내 성격상 이렇게 매일 치열하게 쓸 수는 없다.
매일 치열하게 쓸 수 있는 이유는,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깨뜨려지고 고정관념이 드러나서 부끄러워지고
그래서 살아나는 환희를 누려가기 때문이다.

내가 깨뜨려지는 그 '의외성',
그 '놀라움'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믿는다.

말씀이 나의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무서운 사람이 되지 않길,
말씀으로 날마더 내가 깨뜨려지는 '의외성'을 
날마다 경험하고 누려가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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