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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무리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17 00:55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무리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누가복음 6:12-26)

1. 세 부류의 사람들
     
‘제자는 타고 날까, 아니면 훈련될까?’
라는 주제가 한 때 유행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보는 ‘제자’는 
타고 나느냐, 훈련되느냐의 관점으로만 정의하기 어려워 보인다.
제자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누가는 주님 주변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했다.
무리, 제자, 사도였다. 

이 세 부류는 어떻게 정의되는 것일까?
어떤 기준으로 세 부류가 나눠지는 것일까?
정말 '훈련'으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는 것일까?

주님이 12 사도를 뽑으실 때 어떤 기준으로 뽑으셨을까?
그 기준으로 무리, 제자, 사도가 나눠질 듯 한데,
주님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기준은 보이지 않고 딱 한 가지가 보인다.

(눅 6:12, 새번역)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12 사도를 뽑기 전에 주님은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
'기도'라는 주술적이거나 종교적인 행위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셨다.

밤을 새우면서까지 하나님과 대화하신 후에 
12 사도를 뽑으셨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시사하지 않을까?

2. 무리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무리에서 탁월해 보이는 사람을 뽑아서 
기도 훈련, 성경 읽기 훈련, 선교 훈련 등을 시켜서 제자가 되게 하고, 
제자 중에서 더 지옥 훈련을 시켜서 사도를 뽑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주님이 하신 일을 아무리 봐도 그런 과정은 없다. 
그런 지옥 훈련을 통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될까?
세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을 봐야 할 것 같다.

1) 무리

(눅 6:18, 새번역)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좋은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리'였는데,
누가는 그들을 '몰려온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좋은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숫자가 무척 많다는 의미겠다.

2) 제자 

그렇다면 '제자'는 어떤 사람일까?
주님의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산상수훈'이다. 
이 산상수훈은 누구에게 하신 가르침일까?

(눅 6:20, 새번역)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산상수훈은 '무리'에게가 아니라 '제자'에게 주신 가르침이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치신 것이다.

지금 가난하고, 지금 굶주리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이 복이 있고,
지금 부요한 사람,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의 의미는 무엇일까?

훈련을 통해서 기도라는 기술을 가지게 되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인이 되고 
큐티라는 기술을 습득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됨은 그런 '훈련'이나 '기술 습득'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삶의 자세와 가치관과 관계가 깊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삶이 목표라면
그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
'지금' 이 땅에서 잘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싶다면
제자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
제자는 완전히 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부자 되고 성공하고 
이 땅에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나중에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 
삶의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나는 사람이 제자다.

3) 사도 

그럼 사도는 어떤 사람들일까?
주님이 사도를 뽑으신 기준은 무엇일까?
기준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주님은 사도를 뽑기 전에 밤 세워 하나님과 대화하셨다.

사도들은 무리, 또는 제자들과 다른 탁월한 면이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들의 이후 행적을 아무리 봐도 
지적인 탁월함이나 신앙적이나 성품적으로도 
탁월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사도로 뽑혔는지 알 수 없다.
주님과 하나님의 대화에 그 힌트가 있겠지만
어떤 대화를 하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사도로 뽑힌 기준은 영원히 미궁으로 빠진 것 같다.

왜 기준을 밝히지 않았을까?
사도가 되는 그 놀랍고 영광스러운 기준을 백일하게 밝혀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려고 할 것 아닐까?

그래야 더 좋은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 중에서 탁월한 사람을 뽑아서 
훌륭하고 멋진 사도가 세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길을 전혀 선택하지 않으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한 것 같다.
사도가 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무리냐, 제자냐, 사도냐에 신경 쓰고 
무리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사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사실 세상의 가치관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중요할까?
산상수훈이다.
주님이 산 위에서 가르치신 그 교훈이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무리든 제자든 사도든 
그 신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가치대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
'지금' 이 땅에서 부자되고 성공하는 것이 
세상 가치관의 핵심인데,
그 가치관을 넘어서서 이 땅의 삶을 넘어서는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의 핵심이다.

무리인지 제자인지를 따져 보고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 사도의 자리를 넘보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으려는 마음 자세라면
이미 그 자체가 신자의 삶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삶이다.

교회 안에 있고 
신자들의 모임 안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가 올바른 신자일 수는 없다.

신자는 평신도인지 집사님이 권사인지 장로인지 목사인지
하는 종교적 신분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종교적 신분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스스로 신자가 맞는지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신자는 '지금'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그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무리나 제자나 사도라는 신분 
또는 평신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라는 신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신자다.

4. 나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라는 질문을 참 많이도 들었다.
무리에서 제자로 옮겨가야 한다고 배우기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애쓰기도 했다.

너무 졸리는 것을 무릅쓰고 기도하고 
지겨워도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세 시간씩 드리는 예배에 무릎을 꿇고 참여하기도 했다.
거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음식을 가려서 먹기도 했다.

그렇게 힘쓰고 애를 썼음에도 
내가 제자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거룩해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훈련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절망이 커지기만 했다.

기도는 여전히 졸립고 
성경은 여전히 재미가 없고 
세 시간씩 드리는 예배와 공중 기도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물론 가끔씩은 은혜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재미가 없는 그 상태는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지겨움과 졸음과 싸우면서 신앙훈련을 했으니 나는 제자였을까?
남들보다 종교적 열심이 조금 많았으니 나는 
무리에서 제자로 많이 옮겨간 것일까?

지금은 나는 제자일까?
아니면 사도일까?
아니면 제자나 사도 중 하나라고 착각하지만
여전히 '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일까?

나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평신도냐 집사냐 권사냐 장로냐 심지어 목사냐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신자일 뿐이다.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목사든 집사든 장로든 나에게는 모두 
한 사람의 신자일 뿐이다.

신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신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주님과의 교제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 땅의 삶이 중요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해서 
주님과의 교제와 대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신자의 삶에서 멀어진 것이다.

교회라는 모임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느냐가 중요해서 
몇백만원, 몇천만원을 헌금으로 내면서까지 
권사나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려는 사람도,
그렇게 시켜려는 사람도 신자의 삶에서 멀어진 것이다.

신자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다.
신자의 주된 관심사는 주님과의 관계다.
주님이 이 땅을 살아가신 가치관이다.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나이 50이 넘어서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되고 싶어서 목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말씀을 통해 살아났기에 
말씀으로 신자들을 세워가고 싶은데
일반 신자에게는 말씀 사역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목사가 되어야 말씀으로 사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다.
목회자로 살아온지 6년이 되었고
목사가 된 지는 4년쯤이 되어간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 등의 직분에
관심이 별로 없다.
그건 그저 '호칭'에 불과하다.

말씀의빛교회의 성도들에게 양해를 얻어서 
다른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였던 분들도 '집사'로 
직분을 통일했다.

사실 '집사'도 직분이라기 보다는 호칭이다.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부르기가 어색해서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에 
호칭만 집사로 한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깟 직분에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서였다.

목사 호칭도 없앴으면 좋겠지만
그건 한국교회의 문화 속에서는 
이단 소리 듣기 딱 좋을 것 같아서 그러진 않았다.

목사인 나도, 집사인 성도들도 
그리고 집사로 불리지 않는 형제, 자매들도 
모두 '성도' 또는 '신자'일 뿐이다.

침례교 전통에 따르면 교회란 '신자들의 모임'이다.
신자란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무리냐, 제자냐, 사도냐 하는 것보다,
장로냐 권사냐 안수집사냐 하는 것보다
심지어 목사가 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느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느냐다.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가득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이 땅에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헛된 직분이나 신분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신자로서 말씀에 삶을 걸고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과 나의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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