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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17 22:16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
(누가복음 6:27-38)

1.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전례가 없는 가르침을 주신다.

(눅 6:27, 새번역)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고,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고...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었다.
율법은 본인이 당한 만큼 갚도록 가르치고 있고 
받은 것 이상으로 갚지 말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너무나 분명했다.
비슷한 말씀을 제법 길게 말씀하시며 강조하기까지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2.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문제가 있다.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냐의 문제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할 수가 없어 보인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더 미워하고 욕을 해줘야 시원한데
그냥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고 잘 해주라니,
그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내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니,
사람을 성인군자로 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이 실수하신 것 같다.
할 수 없는 일을,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이렇게 가르치시면 곤란한 일이다.

예전부터 설교를 들을 때 화가 날 때가 가끔 있었다.
지키기 어려운 목록들을 무조건 나열하기만 하는 설교,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내용을 명령문으로 말하는 설교가 그랬다.

설교자가 명령문을 나열하면 할수록  
마음 속에서 거부 반응이 생기면서 
'당신은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걸 말하나요?'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많은 명령문을 듣고 
그대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주님도 그렇게 명령문만 나열한 설교자와 비슷하게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길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 같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불편하고 
서서히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내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3. 심지어 더 열받는 사실

심지어 읽는데 열을 받는 내용을 만났다.

(눅 6:37, 새번역)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이 구절은 참으로 화가 나고 열이 받는 구절이다.
주로 이 구절을 많이 인용한 자들이 
비판 받을 자들, 욕을 먹어야 하는 자들, 용서가 잘 안 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성범죄를 저지르고, 재정 비리를 저지른 목사가 
'주의 종 비판하면 안 된다.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했어.'
라는 말을 단골 메뉴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악한 자들이 인용한 것처럼
정말 그렇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총체적 난국이다.

4. 한 줄기 희망

도대체 이 본문을 어떻게 받아야 하며
나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난감해 하면서 
본문을 읽고 있는데,  
한 줄기 희망 같은 구절을 만난다. 

(눅 6:36, 새번역)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
라는 전제 조건이 한 줄기 희망이다.

원수 사랑,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
비판하지 않는 것 등의 내용이 중요한데, 
그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 같이'다.

섣불리 인간적인 관점으로 원수 사랑을 생각하고 
본인의 이해 안에서 비판 금지를 생각해서는 안 되고,
전제 조건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

즉 그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시듯 사랑해야 하고 
그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판하지 않으심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본 받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본질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일은, 
'그저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이 원수를 어떻게 대하시는지'가 되어야 한다.

무조건 비판하지 않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자비로우신지 알아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과 '공의'를 균형있게 갖추셨다.
사랑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정당한 심판을 하신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사악한 죄를 지어도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도 그렇게는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사악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공의롭게' 
비판하고 심판에 넘겨지게 해야 한다. 
그러나 '공의'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감정을 
그에게 쏟아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도 죄인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고,
심지어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포로로 보내기까지 하셨다.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판하기도 하셨다. 

'네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라는 구절이 있어서,
원수 사랑, 비판 금지 등의 주님의 말씀이  
공의가 없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 전혀 아니라,
정당한 선을 넘어서 개인적인 보복을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신자가 해야 가장 중요한 할 일은 
용서를 잘 하는 것, 
원수까지 용서하는 것, 
불의한 자들을 비판하지 않는 것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떤 내용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고 닮아가는 것이다.

5. 나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섬기면서 
교회들과 목사들의 악함에 대해서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말씀을 기준으로 대형교회들과 목사들,
그리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크지 못한 교회와 목사들'의 
비리와 사악함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당연히 나의 묵상글에 이런 내용들이 많이 들어갔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오기도 했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비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비판하냐?'
'그것도 큰 교회를 세운 훌륭한 목사님들을 왜 비난하냐?'
'너는 잘 났냐?' 등의 내용이었다.

나는 '훌륭한 목사'를 비판한 적이 없다.
죄를 지은 목사들, 사악한 짓을 한 
위선적인 목사들을 비판했을 뿐이다.

그들의 죄를 모르는 신자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에,
나도 평신도였을 때는 그런 내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일 뿐이겠지만
말하고 알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비판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특히 성경의 기준에서 
그들이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를 알아야 
교회나 목사 선택에 있어서 어리석은 실수를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틀리고 악한 목사들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묵상글에서 지우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도 제법 많은 욕을 먹었다.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열심히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세뇌'에 가까운 상태였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비판하지 말라'는 그 구절 하나만으로 
말도 안 되는 주장만 계속 했다.
결국 차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례하기도 했다.

나는 교회를 허무는 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 교회를 사랑한다.
교회는 나의 사랑이요 나를 살린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나의 아픔이요 눈물이다.

수많은 사악한 목사들과 장로들과 
탐욕에 찌든 자들에 의해 정복 당해서 
죽음과 멸망의 병을 앓고 있는
아프고 슬프고 처절하게 눈물 나는 상태가 되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한국 교회는 나에게 원수가 아니라 
가슴 저리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래서 너무나 사랑하는 한국 교회를 망치는 자들에 대해 
나는 화가 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 같은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의 할 일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신자들이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도록, 
그래서 말씀을 기준으로 맹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가고 경험하도록 
돕고 세워가는 것이다.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결코 
죄를 용인하는 자비하심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하나님의 균형 잡힌 자비하심을 조금씩 
닮아가게 될 것을 믿기 때문에, 
나는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을 세우는 일에만 집중하려 한다.

그런데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을 
수천 수만 명을 세우려는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없다.
나의 주제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시는 영혼들을 만나서 
말씀으로 교제하면서 한 분 한 분 세워가고 싶다.
목회를 시작할 때 목표가 10명이었다.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 속에서 스스로 은혜를 캐내는 사람 10명.

지금 그 숫자가 채워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여전히 10명을 목표로 한 분 한 분 세워갈 뿐이다.

헛된 숫자 놀음에 빠지지 않고 
내가 날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르게 알아가고 
바르게 닮아가는 성숙한 신자가 되어가길, 
그리고 한 분 한 분 그런 사람으로 세워가면서 
끝까지 행복하게 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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