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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예수님을 바라보자'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21 23:10

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담임목사.(사진제공=우리가꿈꾸는교회)

얼마 전 SNS에서 본 한 분의 글이다. 

처음 유명한 분들과 페이스북에서 친구가 되어 너무 기뻤다는 것이다. 은근한 자부심도 생겼고, 언제든 생각을 교류하면서 대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들에게서 조용히 ‘친구’가 풀려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만 덩그러니 팔로우 설정이 되어있는 것을 보며 실망감을 표현하는 글이었다.

소셜미디어가 처음 등장하고 심겨준 환상이 있다. 초연결사회다. 유명인들과 관계를 맺고 다이렉트로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실체가 없는 관계성 속에서 실망감을 갖게 될 때가 있다. 한 커풀 벗겨보면 SNS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관계도 사고 버리는 “소비주의”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공산주의와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묶여졌기 때문이듯, 하나님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공동체감은 온라인 안에서도 가능함을 본다.)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페이스북 친구는 아파 누워있을 때 곁에서 따뜻한 차를 내려주지 못한다고 말하며 “물리적 공동체에는 가상 공동체가 따라갈 수 없는 깊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오늘은 ‘소비주의’에 관해서 좀 얘기하고 싶다.

<소비의 사회>라는 책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에 따르면 오늘의 사회는 “소비를 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시대이다.

생각해보라.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사는 이유. 
인사동의 쌈지길 등의 핫플레이스를 찾아 공간을 소비하는 이유.
유행하는 패션과, 최신 스마트기기를 구매하고 싶은 이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한편 연세대 윤태영 교수는 <소비 수업>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이 고단함도 마다않고 소비를 찾는 핵심적인 이유를 ‘구별짓기’라고 규정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구별짓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소비를 통해서 나를 어떤 부류의 사람과 같은 위치에 놓으려고 하고, 소비를 통해서 어떤 사람과 나 사이에 경계를 긋기도 함으로서 나를 어떤 류의 사람으로 구별짓는 것이다.

윤 교수는 “현대인들은 사물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구별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소비한다.”라고 말한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랜 만에 길에서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 그가 입고 있는 옷과 가방, 머리, 타고 온 자동차를 보면서 우리는 그동안의 그의 삶에 대해서 순식간에 이해해버린다. 물고기가 물 속에 살듯, 소비사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가 소비한 것들을 보면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소비 자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자동차는 재벌들이 타는 것과 똑같은데, 그가 돌아가는 집은 어떤가? 재벌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박규상 홍익대 겸임교수는 그의 저서 <행복한 사람은 소비하지 않는다>에서, ‘사람들이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물건을 살까’ 라는 흥미로운 질문에 대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소비하는 이유는 ‘일상의 우울함’과 관련이 있다. 소비사회는 시장경쟁주의의 산물이다. 기회가 평등하다고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는 시장구조에서 현실은 어떤가? 평등하지 않은 승자독식의 사회, 선택 받기 위해 뛰어보지만 도달할 수 없는 절망감, 패배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시대정신이다. 일상은 온통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난관들로 가득차 있다.

이런 우울한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으로서 사람들은 일상적으로는 경험되지 않는 ‘비일상’적인 경험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잊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이 고객이 되어 점원들에게 똑같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

소비주의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거나 경험함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현실보다 더 낫게 규정하려고 몸부림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윤태영 교수의 말처럼 “소비사회의 욕구가 남들과 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면, 그 소비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 시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의 차이를 만든다. 왜 패션의 유행이 계속 바뀌고 톰과 제리처럼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가? 겨우 이뤄낸 것이 하루만에 따라잡히고, 뒤처져 열등한 경험을 남기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한계가 없으며, 우리는 소비사회 안에 무한히 종속되어 버렸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안에서도 ‘소비주의’ 문화가 역으로 침투한 지 오래다.

그사랑교회 고상섭 목사님은 “현대 문화는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이 절대 가치가 되었기 때문에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하나님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자아 실현’에 몰두하는 삶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의 핵심 곧 ‘자기 부인’, ‘자기 희생’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결과 교회 안에 새로운 신학이 스며들었다. 현세의 삶의 복을 약속하는 ‘번영신학’이라는 돌연변이다. 번영신학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나온 가르침으로, 철저히 소비적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물질적인 축복과 연결시킨다.

데이비드 W. 존스는 번영신학의 문제점을 가리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잘못된 관점을 주기 때문에 거짓 복음”이라고 말한다. 번영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는 이유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종의 거래관계로 만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해 그분을 섬기게 해. 여기에 하나님의 먼저되신 은혜는 없다.

한신대 강원돈 교수는 번영신학이 “돈과 권력, 명예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고의 가치”에 올려놓으며,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되는 문제”를 갖게 한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물질적으로 부자는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 받은 사람이 되고, 가난한 자들, 병 약한 자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봄으로서 부자들의 욕망은 정당화되고, 가난한 자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의 불균형, 양극화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번영신학은 사람들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든다면서 1)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것에 집중하게 하며, 2) 하나님 보다 재물을 의지하게 만들며, 3)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을 질식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도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소비자적인 관점으로 예수님을 대한다.

하나는 ‘길 위에서 환영하는 무리’고, 또 하나는 ‘성전에서 외면하는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은 각각, ‘예수님을 통해 나의 꿈을 성취하고 싶은 욕망’과, ‘예수님이 아닌 나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

한쪽은 ‘환영’했고, 한쪽은 ‘거절’했다.

그러나 사실 둘 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예수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들의 소비자 적인 태도는 빌라도의 재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철저히 계산적이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제조하는 공장”이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그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팀 켈러는 지옥을 가리켜 자기중심적인 삶의 결말로서 그가 원하는 바대로 내버려짐. 곧 철저히 ‘고독함’이라고 정의내린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귐으로 우리를 초대하시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결국 그 바람대로 된다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우주 미아가 된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결말은 우주에서 추진장치 없이, 점프를 뛴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중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비주의가 자기증명과 관련되어 있다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자기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팔아 우리를 사셨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그 신분에 올려놓기 위하여 애를 써지 않아도 되며, 그분이 그렇게 마침표를 찍으심으로 우리는 자기증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비주의를 끝내는 예수님의 소비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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