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30일 토요일
뉴스홈 종교
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21 23:12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누가복음 7:36-50)

1. 많이 사랑하는 자

주님이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초대받으셨다. 
그 동네에 있는 죄인인 여자 하나가 들어와서 
주님께 이런 행동을 했다.

(눅 7:38, 새번역)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했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

(눅 7:47,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고,
그래서 주님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렸고 
주님의 발에 부었고 머리털로 닦았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유가 분명하다.
용서받은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도,
또는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찬양을 해도 
용서받은 것이 없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죄인인 여자'는 죄인임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많은 죄를 주님만 해결하실 수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주님께 자신의 소중한 것을 
눈물과 함께 다 드릴 만큼 주님을 사랑했다.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2. 적게 사랑하는 자

주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죄인인 여자가 주님께 옥합을 붓고 
울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는 장명을 보고 
시몬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눅 7:39, 새번역)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이 한 마디가 바라새인인 시몬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대부분의 바리새인의 못된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건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습성이었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주님은 왜 그 여자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으시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고,
그저 율법의 기준으로 옳은지 틀린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시몬은 왜 이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시몬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서 그 이유가 짐작된다.

(눅 7:44-46, 새번역) [44]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45]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시몬은 주님을 집에 초대하고서도 
주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주님께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도 않았다.
이 모든 행동들은 유대인들이 손님을 초대할 때 했던 
어떤 환대의 행동도 시몬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죄인인 여자의 환대를 받아들여서 
초대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시몬은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몬이 주님을 환대하지 않음으로 실추시킨 주님의 명예를,
여인은 자신의 소중한 향유와 눈물을 가지고 회복시켰음을 
주님은 상기시켜 주셨다.

시몬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먼저 바리새인이면서 왜 주님을 집에 초대했을까?
주님이 선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주님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에 주님을 초대했을 것이다.

그럼 왜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어떤 환대의 행동도 하지 않았을까?
동료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주님을 환대하면 주님을 배척하는 다른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좋아지지 않게 될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주님을 인정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환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님을 적게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던 시몬이다.

왜 적게 사랑했을까?
그 이유 또한 분명하다.
용서받은 것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봤을 때
분명 자신의 죄에 대해 해답을 가진 분 같기는 한데,
자신의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주님을 환대할 마음은 없었던 시몬이었다.

3. 인생의 문제는 죄 용서의 문제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무엇을 다루는 신앙일까?
말할 것도 없이 '죄의 문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 용서'다.
죄의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더 중요한 포인트는 '죄 용서'다.

'죄인인 한 여자'는 그 지역에서 알려진 죄인이었다.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없는 여인이었다.
온갖 수치와 모멸과 눈총을 받으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 모든 수치와 왕따보다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문제였다. 

수치와 조롱은 참으면 될 것 같은데
수치와 조롱을 받아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힘들고 아프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다.
주님을 따라다니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죄를 지적하는 분이 아니라,
죄에 대해 비난하고 조롱하는 분도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분이심을.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님이 들어가신 집이 바리새인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무시와 조롱을 당할 것을 짐작했음에도 
주님께 나아가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을 씼었다.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던 죄의 문제를
주님이 '용서'라는 방식으로 해결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다.

4. 그렇다면 죄가 없는 사람은?

그렇다면 죄가 없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기준으로 죄를 짓지 않는'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율법을 기준으로 죄를 짓지 않아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죄 용서'가 자신에게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죄가 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바래시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 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탐욕과 옴욕과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 위선을 갖고 살아가면서 주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도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것 같지만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러움과 악함과 
탐욕과 욕망을 직면하고 괴로움을 갖고 살아가는 바리새인들은
'죄 용서'가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동료 바리새인들이 두려워서 
겉으로 주님을 따른다고 표시는 내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응원했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지만
적게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결국 자타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인생의 근본 문제는 '죄 용서'의 문제였다.

5. 나는?

나는 눈물이 많고 감사도 많다.
왜 그럴까?
이유가 간단하고 분명하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나름 알기 때문이고 
내 죄를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내가 부르지 못하는 찬양이 있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라는 찬양이었다.

주님이 나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주님이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말이,
나 때문에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이라는 말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예수 사랑해요.'라는 고백도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런 찬양을 부를 때면 입을 열지 못했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데,
나의 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더러운 나의 입으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지금은 어떨까?
조금은 달라졌다.
그런 찬양들을 할 수가 있다.
부끄럽지만 온 맘을 다해 부를 수 있다.

내가 잘 나서가 전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고개를 들지 못할 죄인이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죄인이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주님이 해결해주셨고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법 오랫동안 누렸다.
죄 용서를 받은 바가 너무 커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주님이 좋다.
주님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일이 있다.
형식적인 신앙인, 
바리새인 같이 딱딱한 신앙인, 
화석화된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고도 
타락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생생한 신앙인으로 
계속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고,
내가 용서받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또한 잊지 않아야 하고,
용서받은 죄인이로서의 나의 신분에 대해서 
늘 감격적으로 누려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매일 말씀을 묵상한다.
'연구, 공부' 해서 성경 지식을 쌓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지식은 적어도 좋고,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잘 몰라도 좋다.
그 날 묵상하는 성경 속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고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주님의 사람을 뜨겁게 회복하면 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묵상해왔더니 
저절로 성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지만
나는 여전히 성경 지식을 많이 갖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살아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말씀을 통해 다른 누군가도 살아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지식 축적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생명의 교류가 사람을 살린다고 믿는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고 
자신의 죄가 용서받은 감격을 날마다 누려가고 
그래서 외식에 빠지지 않고,
용서 받은 것이 많아서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성도들과 내가 되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