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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 '믿는다(피스튜오)는 말의 의미'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24 23:29

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믿는다(피스튜오)’는 말의 의미
   
어떤 분들은 다음 설명에 대하여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참 복음이나 거짓 복음이나 간에 구원을 위한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검토되고 해결되어야할 핵심 문제는 신약에서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되며 정의(定義)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자신에게 적용될 때 대단히 신중하게 규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죄의 형벌을 받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현대 대중 복음이 와서 멈추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제시한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에 대한 오늘 날 유행하는 복음은, 구원은 "값없는 선물"이고 사람이 아무 값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앉아서 "비용을(the cost) 예산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4:26-33).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은 그 사람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복음서 안에 대단히 많이 나타나있습니다.(마 16:24-27; 막 1:14-15; 눅 14:25-33; 눅 18:18-30; 요 12:24-2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부인과,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것과, 회개 즉 자기 중심과 죄에서 떠나 온전한 헌신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것, 확실한 의지로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4-27)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 18:18-30)

여기에 바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고려해야할 "대가"가 있습니다. 1세기에 그랬던 것 같이, 오늘 날에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가르치셨던 같이, 오늘날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표현으로 설명한다면, 어떠한 세대나 민족에게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복음에 응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 중 한 좋은 예는 "부자 청년"입니다(눅 18:18-25). 이 사람은 진실로 영생을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 왔노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과 동기를 알고 계셨지요. 그는 부자였고 아마 재산에 인생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실제적 구도자 (active seeker)"에게 손쉬운 복음 1, 2, 3 단계를 제시했나요? 분명히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의 뿌리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그의 재물에 의존하는 자신의 끈을 단절해버리고 예수님께 돌아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들은 "그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더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사람은 비록 영생에 대한 그의 소원이 진지했다 할지라도 이 세상 삶 이후의 영생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보장(保障)은 이 세상의 재물과 소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조건에 복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불해야할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소유를 사랑하였고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마 6:24). (독자들은 지금 저자가 행여 "행위 구원"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서적 구원의 믿음(saving faith)"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젊은 관원에게 그가 원하는 영생을 자신의 조건에 따라 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 구하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구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해온 것처럼, 이 청년을 격려해서 거짓 고백의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청년을 떠나가게 했고 조금도 설득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죄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회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할 상태가 아닌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정의에 따른 "믿음"으로 예수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서방 세계에 이 청년만큼 재산을 가진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젊은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똑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충실하게 이 부자들에게 전도했다면, 그들의 반응은 이 부자 청년의 반응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불할 대가를 계산해 보아야 했을 것이고, 불과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시샘과, 재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또한 하나님 보다 세상 재물을 더 의뢰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은 채, 돌아 설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슬픈 현실은 이 부유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켜 왔습니다. 대부분의 서방 세계 사람들은 (제 3 세계의 사람들에 비해서)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대가(cost)도 희생도 요구하지 아니하는 복음에 많이 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심장을 바칠 아무런 심각한 의지도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재물에 대한 사랑과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그 재물이 제공하는 보장과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해 주셨으며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영접하시지 않은 것처럼 이들을 영접하시지 않은 것은 대단히 분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것처럼, 오늘날 전도자들과 교회들에 의해서 돌려보내어 졌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 속에서 영접 받는 것 보다는, 우리가 신약 성경을 정직하게 조사해 보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와 자신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자신의 생명과 영원한 운명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바치는 헌신입니다. 사실, 헌신이란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이라는 헬라어 "피스튜오"는 영어로 번역할 때 "믿는다" "헌신한다" "위탁한다" "신뢰한다"는 말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hayer가 저술한 Greek-English Lexicon에 의하면, "피스튜오"란 한 마디로 "믿음으로 자신을 바친다 (혹은 넘긴다) (to give oneself up to in faith)" 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그 근본적 정의인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나 위에 군림하는)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그 결과, 신자의 삶 가운데 그 분의 통치와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지체 없이 다소의 사울과 같이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할 것입니다 (행 9:6).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진정한 중생에 절대적 필요 요소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하여 그 분의 제자 될 것과 온전하게 순종할 것을 신실하게 헌신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제자의 삶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온전하게 다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미를 배우는 것은 일생에 걸쳐 배워야할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 아이의 이해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그것이 진실한 믿음이라면, 어떠한 의식적 유보(留保) 없이 헌신하는 믿음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부연(敷衍)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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