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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길위의교회 김선주 목사, '벌레가 되지 않을래요.'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3-07 06:00

대전 길위의교회 김선주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벌레가 되지 않을래요 >

교회를 뒤집어엎고 싶다. 낡고 오래된 관습과 패러다임을 다 파기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교리적 인식체계까지 다 뒤집고 싶다. 특히 교회 교육에 관한 모든 걸 다 바꾸고 싶다. 그래서 나는 항상 모험을 시도한다. 모험이란 위험을 예측하고 그것을 감내할 자세와 태도로 행하는 실험이다. 내 목회는 항상 실험적이다. 

이제 주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4명의 여자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운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성경을 읽거나 암송하고, 성경 지식을 주입하는 따위의 기존 방식이 아니다. 소설을 읽고 토론하며 그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도출된 주제에 성경을 접목하는 방식이다. 그렇다. 성경을 연역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고 찾은 주제에 성경을 귀납적으로 접목하여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와 존재의 모든 키워드를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다. 비성경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성격적이다.

지난 주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오라 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는 기괴한 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로 문제를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벌레’라 부르는 이유를 따져보았다. ‘돈벌레’, ‘공부벌레’, ‘일벨레’, ‘일베충’ 등과 같이 부르는 이유를 생각케 했다. 벌레라는 접사는 어떤 혐오스러운 대상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인간의 고유한 품격을 잃은 존재들을 벌레 같은 혐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셀러리맨이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는 건 돈을 벌기 위해 조직과 사회에 노예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풍부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왜 인간성을 잃어버렸는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목적은 인간적인 풍요를 위한 것인데 오히려 인간적인 삶보다 돈이 목적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은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보다 출근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는다. 출근시간을 지키지 못해 해고당할까봐 강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간, 그 인간이 살아가는 게 현대문명이다.

현대문명은 비극적이다. 비극적인 문명에 사는 사람의 운명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창세기 1장 26-29절을 아이들에게 읽도록 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는 벌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귀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벌레가 되었는가. 다시 한 번 현대문명을 돌아보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며 이 소통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벌레와 같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간극이 크다는 사실 앞에 서는 게 예배다. 예배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다. 예배는 일테면 이런 선언인 셈이다. “나는 벌레가 되지 않을래요.”

세상에는 일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가장 근본은 예배하는 데 있다. 예배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벌레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영혼의 날개를 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예배는 관습적으로 다니는 학교나 학원처럼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노예처럼 기대와 소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부름받았다. 

이번 주는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선고>와 <시골의사>를 읽고 같은 방식의 공부를 했다. 한 아이가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나 교회에서 성경공부하는데, 똑똑해지는 거 같아.”

그런데 이젠 이런 일에 내가 직접 나서서 열변을 토하며 에너지를 쏟기에 기력이 많이 딸린다. 나이 탓인가 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 교수법을 알려주고 싶은데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 같은 인문학적 콘텐츠를 많이 접하고 사유한 사람은 조금만 터치를 해 줘도 쉽게 접근하고 응용할 수 있는데 기존의 관습에 젖어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이 때,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죽음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향을 잘 읽고 틈새를 볼 수 있다면 내 방식은 사실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교회들이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다. 틀에 박힌 교리적 가르침과 고답적인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우매한 열정에 빠트리려고 최면을 걸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이제 사람들은 최면에 잘 걸리지도 않고 최면에 걸린 사람들도 하나씩 깨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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