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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고통에 대하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4-09 05:00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통에 대하여

요즘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은 고통 없이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복된 일인가, 모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가장 큰 고통은 해외에서 식중독에 걸려 생사의 갈림 길에 있었던 적이다. 결혼 후 혼자 해외 생활을 할 때였다. 그때 너무 아파서, 차라리 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길 기도했다. 다행히 거기서 벗어났다.

학창시절 TB를 비롯, 폐렴 등 몇 차례 몸의 고통으로 몹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어느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배가 아플 때라고 하였다. 배아픈 고통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 말고,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산다. 많은 고통이 사람에게서 온다. 사람이 가까울수록, 그 사람은 옆의 사람에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

가장 힘든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고통일 것이다. 상관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지만, 가까울수록 그들의 언어 행동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느끼는 고통은 더 큰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취약한 위치로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서 이 고통이 오는가? 기쁨의 동산 에덴에는 고통이 없었다. 우리 조상이 하나님의 경고에도 계명을 범하고, 스스로 사는 존재로 나아가기를 선택했을 때, 고통이 부과되었다. 해산의  고통, 노동의 고통, 가시와 엉겅퀴, 곧, 사는 환경이 고통스러울 것이 예고되었고, 마침내 죽음의 길로 나아가야 했다. 이런 고통을 선고하시는 하나님이 그 인간의 가는 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셨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고통의 경험 앞에서 사람은 그 존재의 말할 수 없는 미약함을 체험한다. 평소에 건강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그 고통 앞에서는 허무하고 허약한 피조물로 드러날뿐이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고대 총장이었던 유진오 박사께서 오랜 병고로 초췌한 모습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질병과 고통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빼앗긴다. 그 똑똑하신 분도 고통과 질병 속에 삼키우고 말았다.

1990년일까, 한국에 있을 때, 어느 은행의 부행장이었던 교우께서 위암과 싸우면서, 하신 말이 기억된다.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셨다. 배가 아픈 것의 고통을 말씀하셨다. 배아픔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 병상 위에서 그말을 하신 분의 기억이 새롭다.

살아있는 사람은 언젠가, 그 고통의 과정을 지나 죽음의 길로 간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났나니 마치 불티가 위로 날음 같다," 욥기의 한 구절이다. 고난은 에덴 밖에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 삶의 본질이라고 들린다. 고난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고통(pain)은 몸이나 마음으로 느끼는 아픈 감각을 의미하는 반면, 고난(suffering)은 그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고난이든 고통이든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떠날 수 없는 삶의 본질인 것을 알 때, 고통없이, 고난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가! 요즘 내가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사람은 이 고난의 현실을 살면서, 마땅히 고난을 감각하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런 고통을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과 평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생각도 과거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더 간절할 것이다.

가까이서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의 아픈 사연을 듣는다. 고통을 아는 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가까운 분들의 고통을 함께 감각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 고통 속에 얼마나 외로운지를 지각한다. 차라리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이 다행일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따로 계신다. 계시록 안에는 죽기를 원하면서 죽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을 묘사한다. 고통 속에 잠기고, 그것을 맛보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다 알 수 있을까?

이런 고통의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허무함과 작음을 알고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하루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 보혈을 의지해서 살기를 원한다. 그 피가 우리를 씻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덮어 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지를 넘어 다가오는 고통 앞에 우리는 다른 수단을 갖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홀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주님도 우리 고통을 짊어지시고, 함께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고통의 시간 속에 이 믿음은 얼마나 위로가 될까?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자리가 이땅이 아니라, 다가오는 나라에 있음을 고백한다. 거기는 아픈 것이나, 애곡하는 것, 죽음이 없는 세상임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통이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하늘로 부르시는 손짓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 하늘의 손짓을 가장 강렬하게 보고 듣는 것은, 그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이 아닐까? 

이땅은 우리가 지나갈 곳이지, 머무를 곳이 아니다. 그것을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고통의 경험 속에서다.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에도, 고통 속에 머물고 있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속히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불러  주시기를 기도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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