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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용산기지의 역사를 찾아서' 통합본 발간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서승희기자 송고시간 2021-04-28 12:58

성장현 용산구청장/아시아뉴스통신 DB

[아시아뉴스통신=서승희 기자] 서울 용산구가 ‘용산기지의 역사를 찾아서’ 통합본을 200부 발간했다.
총 3권, 1028쪽 분량으로 용산기지 역사를 종합적으로 최초 규명한 책이다. 
1권은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 : AD.97~1953’, 2권은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3권은 ‘6·25전쟁과 용산기지’ 제명을 달았다.
 
◇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 : AD.97~1953
1권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는 2014년 처음 발간됐다. 당초 304쪽이었는데 그간 세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분량이 420쪽으로 늘었다.

전체 11장으로 ▲러일전쟁(1904년) 이전 용산 ▲러일전쟁과 용산 군사기지화 ▲용산기지 내 일본군 주요시설 현황 ▲강제병합과 용산기지 ▲상주군 체제로의 전환 ▲대륙침략과 전시동원기지로의 변화 ▲아시아태평양전쟁과 뉴기니로의 동원 ▲해방 정국 하 용산기지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근대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개발된 용산이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미·국군 요충지로 활용된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1905년 일제는 옛 용산 둔지미마을 일대 118만평(최초 계획은 300만평)을 강제로 수용, 8년(1906~1913년)에 걸친 공사 끝에 군사령부, 사단사령부, 보병연대, 기병중대, 야포병중대, 병기지창, 육군창고, 위수병원, 위수감옥, 사격장, 연병장, 헌병분대 등 시설을 만들었으며 이 중 일부가 지금까지 용산 미군기지 내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5~1922년 상주군 체제로의 전환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전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제13, 6, 2, 8, 9사단이 2년 단위로 용산기지를 맡았는데 이후 일제가 한반도 내 2개(19, 20) 사단을 증설, 이 중 20사단으로 하여금 용산기지를 운용토록 했다. 20사단은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1945년)에도 연달아 참전한다.

미군이 용산기지를 접수한 건 1945년 9월 8일의 일이다. 3년 간 미군정 후 1949년 6월까지 대부분의 미 병력이 철수를 했지만 6·25전쟁 후 재 주둔, 70년이 지난 현재 기지 반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증보판은 저자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이 미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등에서 수집한 도판을 다수 추가, 시각효과를 높인 게 특징이다.

또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 탄압실상을 보여주는 ‘조선소요사건 관계서류(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경성 연합군 포로수용소(현 청파동 신광여고 부지) 수감 명부’ 같은 자료를 더해 책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2권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는 지난 2017년 발행됐다. 분량이 당초 252쪽이었는데 증보작업으로 96쪽이 늘었다.

책의 주 내용은 용산기지 ‘둔지산(屯之山)’ 일대에 자리했던 마을, 둔지미의 역사다.
저자는 미시사적 연구 방법을 통해 이곳에 살았던 인물(천흥철)의 호적(준호구)을 분석, 당대 삶을 재구성한다. 또 일본 방위성 소장 극비 문서 ‘2개 사단 증설 이유서’를 확보, 용산기지 확장 과정을 거시적으로 분석했다.

일본 방위성 소장 ‘관방 한국수용지에 관한 건(1907년)’과 여기 수록된 ‘한국 용산 군용수용지 명세도(1906년)’ 발굴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해당 문건에는 일제의 둔지미 수용 과정이 상세히 담겨 있으며 명세도를 통해 둔지미 일대 가옥(1만4110칸), 분묘(12만9469총), 전답(89만5552평) 등 위치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증보판에는 ‘관방 한국수용지에 관한 건’ 전문을 번역, 부록으로 실었다. 이에 따르면 일제는 군용지 수용 중 한국민 저항에 크게 고심했으며 결국 수용지 면적을 당초 계획보다 1/3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후 사단 증설 과정에서 또 한 차례 강제 수용(30만평 규모)이 있었고 여기 포함된 둔지미 대촌, 단내촌(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 일대) 주민들은 1916년 경 보광리(현 용산구 보광동) 일대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다. 대촌, 단내촌에는 대규모 연병장이 들어선다.
 
◇ 6·25전쟁과 용산기지

3권 ‘6·25전쟁과 용산기지‘는 지난해 말 발간됐다. 1장 해방정국 하 용산기지, 2장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용산기지의 변화, 3장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용산기지, 4장 6·25전쟁과 용산기지 재건 순으로 전체 260쪽 분량이다. 

1장에서는 1945년 해방 직후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끈 미육군 제24군단의 서울 진주와 일본군 귀환 과정, 24군단 예하 미7사단사령부의 용산기지(캠프 서빙고) 주둔과 활동, 기타 일상사를 다뤘다. 

2장에서는 1948년 미5연대전투단(RCT)을 제외한 주한미군 철수와 1949년 미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 KMAG) 창설 과정을 소개한다.

3장은 1949년~1950년 용산기지를 거쳐 간 두 인물(안두희, 박정희)의 이야기다. 특히 박정희의 경우 좌익 혐의로 군복을 벗은 뒤 민간인 신분으로 용산기지 육본 정보국에서 일했다. 육사 8기생 김종필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4장이 책의 본론이다. 6·25전쟁기 용산기지 피해 양상과 실태, 유엔군사령부(도쿄 극동군사령부)의 미8군 용산기지 배치 계획, 미8군 공병참모부 용산기지 복구 계획, 1952년~1953년 용산기지 복구과정 등을 샅샅이 소개했다.

한국 현대사에 끼친 커다란 영향과 상징성에도 불구, 말 그대로 ’공백상태‘에 있던 미군기지 역사를 NARA 등에서 수집한 자료로 상당 부분 규명해 냈다는 게 이 책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김천수 실장은 “용산기지 역사 연구는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며 “드넓은 호수와 녹지로만 가득한 용산공원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가 담긴 정체성 있는 공원이 조성되길 바란다. 용산공원은 미국의 센터럴파크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지난 10년에 걸친 연구 성과가 1000페이지 넘는 책으로 정리가 됐다”며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용산공원 조성사업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sweat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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