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
[지혜는 에너지가 아니다]
(잠언 8:22-36)
1. 지혜는 에너지일까?
지혜를 추상적이고 막연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지혜가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열심히 배우거나 얻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지혜는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그 지혜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혜는 그런 존재가 맞을까?
한번 얻은 지혜는 사라지지 않아서
무슨 짓을 해도 계속 '지혜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지혜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지혜가 에너지라면 그 생각이 충분히 일리가 있겠지만
지혜는 결코 에너지가 아니다.
2. 지혜는 에너지가 아니다.
지혜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
지혜에 대해 의아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여러 표현 중에 특히 이 표현이
지혜의 놀라운 특징을 잘 표현해 준다.
(잠 8:24, 새번역)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지혜를 '태어났다'
그리고 지혜가 태어난 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간 표현도 등장한다.
(잠 8:29-30, 새번역) 「29」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30」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지혜가 한낱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런 표현들에 의해서 너무나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
지혜는 '인격체'다.
지혜에 대한 표현을 읽고 곰곰히 생각하다 보면
다른 성경이 생각나기도 한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이다.
(요 1:2-4, 새번역)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내용에 있어서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잠언과 요한복음의 내용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지혜는 인격체인데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같다.
3. 지혜자가 되려면?
지혜자가 되어야 신자답게 살 수 있고
지혜자가 되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지혜자가 되어야 이 땅에서 망하지 않을 수 있는데,
문제가 심각해졌다.
지혜는 영원토록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문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지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잠언 저자는 지혜가 인격임을 여러가지 말로 설명한 이후에
'그러므로' 하는 연결사를 사용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러므로'는 인과관계 또는 결론 요약 연결사다.
'그러므로' 뒷부분이 중요하다.
(잠 8:32-33, 새번역) 「32」 그러므로 아이들아,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 길을 따르는 사람이 복이 있다. 「33」 내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무시하지 말아라.
지혜가 인격이기 때문에
지혜자로 살아가려면
지혜의 말을 들어야 하고
지혜의 길을 따라야 하고
지혜의 훈계를 듣고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앞에서부터 계속 가르친 내용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 한 가지 더 있다.
4. 지혜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잠 8:34, 새번역) 날마다 나의 문을 지켜 보며, 내 문설주 곁에 지키고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날마다' 하는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지혜는 인격체다.
인격체와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제'해야 한다.
지혜를 소유해서 영원토록 내 것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느슨해지고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
더 현명하고 탁월하다고 믿고 만다.
그래서 자신의 고집대로 모든 걸 밀고 나간다.
그래서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탁월한 지혜를 소유했다는 솔로몬이 그 길로 갔고
이 시대에 지혜롭다는 유명한 목사들이
거의 한결같이 그 길로 가서
재정 비리에 빠지고 성적인 타락에 빠지고
교회를 사유화해서 자녀에게 세습하는
지혜롭지 못할 뿐 아니라 사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스스로를 지혜자라고 착각했다는 사실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혜자가 되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지혜가 인격이기 때문에
지혜와 '날마다 교제'해야 한다.
지혜와 날마다 교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반대로 지혜와의 교제를 거부한다면
그는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삶이 되고
죽음을 사랑하는 삶이 된다.
(잠 8:35-36, 새번역) 「35」 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36」 그러나 나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5. 나는?
스승의 날을 보냈다.
학원 강사로 살아가던 날에는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크고 작은 선물들과 편지들을 받았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나서부터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성도 숫자가 적기도 하고
내가 성도들의 스승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설교하는 성도'라고 성도들에게
강조해서 말해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스승의 날에는 우리 교회 성도 아닌
몇몇 분으로부터 편지와 선물을 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분들이 포함되어서 더 감동이었다.
내가 스승이어서 기쁜 것이 전혀 아니다.
나는 스승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그저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었을 뿐인데,
그 나눔 때문에 스승의 날에 나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고 싶었다는 말씀이
나에게 제법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누군가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히 '스승'이라니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날마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기 때문이고
그 교제의 내용을 나누었을 뿐인데,
그 교제의 내용이 조금은 지혜롭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지혜'는 나의 것이 전혀 아님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오직 주님만 지혜자이시며 지혜 자체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지혜 자체이신 주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것만이
내가 어리석게 멸망하는 삶을 면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에,
나는 살기 위해 매일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한다.
그리고 그 삶을 살도록 사람들을 권하고
도전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 놀라운 생명의 길을 나만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씀을 제법 오랫동안 묵상했더니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얼마나 뿌리 깊은 죄인인지를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더 깨닫고 발견할 뿐이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지혜이신 주님과 교제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주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을
결코 포기할 수도 없다.
나의 남은 삶 동안에
나의 유일한 소원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며,
그 교제의 내용을 나누며 사는 것이다.
그 삶을 끝까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만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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