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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제일교회 2부 담임 이정만 목사,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9)'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7-23 05:00

서울제일교회 2부 담임 이정만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예수사랑은 차등差等 없는 사랑 입니다.

차별은 차이를 부각하여 구별하는 거고, 차등은 높고 낮음을 따져 서열을 매겨서 구별하는 걸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동안 기독교는 이 이야기에서 작은 아들의 귀가에 중심을 두고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이고 아들의 회개의 중요함을 익혀왔습니다. 이 해석은 좋은 해석임에 분명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본 꼴 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가 신앙을 독려하여 지배하기 좋은 해석 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에 지배층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난하자, 예수가 그들에게 이 비유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의 목적은 아버지의 품성 즉 하나님의 품성을 설명하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제목은  '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적절합니다.

ㄱ. 작은 아들에 대하여

작은 아들은 타지에 가서 아버지로부터 미리 상속받은 돈을 탕진하고, 돼지 키우는 일꾼이 되고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를 먹고 연명했습니다 
유대 랍비 문서에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돼지를 기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재산을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법을 어기고 신앙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신앙을 잃은 아들을 용납한 것 입니다.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용서에 중심을 두지말고 아버지의 사랑에 중심을 두라고 제안합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민음사 280-290p)
회개와 용서의 이야기 이면 살벌하지만 사랑의 이야기 이면 따뜻한 이야기 입니다.

ㄴ. 맏 아들에 대하여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합니다.
1.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기고 명령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 그럼에도 아버지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친구들하고 즐기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3.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라고 항의합니다.

맏 아들은 정의롭고 선한 사람 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지만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을 불러 베푼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 입니다.
규범에 충실한 사람은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악마로 여기며 함께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상속분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불의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자는 선한 자로 남고 악한 자는 악한 자로 남는다 이것이 선한 자의 구호 입니다. 그래야 차별이 일어나서 자신이 돋보입니다. 지금 한국의 여러 보수교회와 성당에서 성 소수자를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입니다.

성서는 어떻게 하면 선한 삶을 사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은 자, 약한 자를 선택하시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며 약한 자가 소외됨 없이 함께 사랑하며 사는 세상을 보여주는 책 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덕주의가 아닙니다.
도덕주의는 강한 것을 사랑하고 약한 것을 미워하고 증오하여 배제합니다.

ㄷ. 아버지에 대하여

작은 아들의 요구에 응해서 재산을 나누어 주고 타지로 떠나도록 허락한 것은 위험한 일을 결정한 것 입니다.
아들을 위험 속으로 떠나보내면서까지 자유를 부여한 것은 아버지의 큰 사랑 입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지를 어버지는 잘 압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애게 예복을 줌으로 아들 지위를 회복해주고, 신을 신김으로 신을 신지 않고 다니는 종이 아님을 선언하고, 인장을 줌으로써 아들의 권위를 세워줍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대접하는 걸 중단하고 맏 아들을 설득하러 나간 것은 체면이 손상되는 행위 입니다. 동양의 아버지는 권위로 강제하지만 맏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강제하지 않고 설득합니다. 앞으로의 재산은 다 너의 것이다 하며 안심을 시켜 줍니다.

본래 사랑에는 위엄 따위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바람은 두 아들이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이 평화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개 사랑으로 호소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사랑으로 잔치에 초대하는 것은 세리와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를 거부하는 사두개인과 바라새인에게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수가 세리와 죄인 즉 불구자, 병자, 부녀자, 고아, 성 매매자, 떠돌이 등 사회 체재로 인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려는 의도와 같습니다.
예수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 입니다.
예수가 바라는 세상은 이런 사람들도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차등 없는 사랑이 펼쳐지는 세상 입니다.

맺는말

김진호는 유대의 법 속에 차이를 차등差等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차등적인 법이 약소국으로서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야훼신앙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위기신학이 폭력성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김진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동인, 156p)
유대인들은 다른나라와의 차별의식만이 아니라 자국내에서도 차등의식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차등 없는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처럼 낮은 자, 약한 자를 낮추고 멸시하지 지말고 동등하게 그 존엄을 지켜 주라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강한 자나 약한 자를 기계적으로 똑같이 사랑한다는 뚯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심하게 편애하십니다.

예수가 바라는 것은 최고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 자유와 정의, 인간의 존엄, 삶의 축제를 모두가 같이 누리는 평등 입니다.(쇠렌 키에르케고어, 사랑의 역사, 다산글방, 615p)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화해의 기재器才인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신학자들은 예수를 역사의 하나님이라 하는데, 칼 바르트는 예수를 화해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칼 바르트 교회교의학4-2 143p)

이 사랑은 차등差等 없는 사랑 입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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