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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아버지 같은 사역자!'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5-14 05:00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린도전서 4:9-21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아버지 같은 사역자

로마의 길거리에는 꽃을 들고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의 행렬이 지나갑니다. 맨 앞에는 악사들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그 뒤를 제물로 바칠 짐승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들로 가득 채워진 마차가 뒤따릅니다. 그 뒤에는 영웅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어릿광대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적을 무찌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이번 전쟁에서 사로잡혀 온 적군의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이 손에 쇠사슬이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벌거벗겨져 있거나,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번 행렬이 끝나면 모두 사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행렬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개선장군의 명예를 한껏 높이기 위해 실제로 행해졌던 일이었습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2020년 5월호, 90).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장소는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입니다. 그곳에는 굶주린 야수들이 한껏 포악성을 드러내고 있었고, 원형 경기장의 객석을 메운 로마 시민들은 환호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원형 경기장 한 가운데에는 곧 야수들의 먹잇감이 될 가련한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쇠사슬에 묶인 패전 장군은 “끄트머리”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의 배경이 됩니다. 또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가련한 죄수들은 “죽이기로 작정된 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의 배경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절).”

여기에 나오는 “죽이기로 작정된 자”와 “끄트머리”는 이러한 로마 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단어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7절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교회 안에서는 이미 배부르고, 이미 풍성한 왕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죽이기로 작정된 자”와 “끄트머리”와 같이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지혜로운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10절).

저는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바울이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난 목록’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1절에서부터 13절에 묘사된 바울의 고난 목록은 간접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정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죄는 하나님의 사역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귀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오직 성도들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스승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수고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6절).”고 그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권면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를 고린도교회에 보내어 바울이 그곳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기 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한 분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제가 청소년 시절에 함께 신앙 생활했던 교회 집사님이셨습니다. 이 집사님은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이 집사님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이 교만합니다.” 어떻게 바울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주장은 바울이 오히려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교만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어린 청소년이었지만, 그 집사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바울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집사님은 목회자와의 갈등을 겪고 교회를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과연 바울이 교만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고,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목사를 본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어린 아이는 영적인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잠자고 있던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목회자의 권위가 무시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제자훈련은 평신도를 깨워 목회자의 동역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일까요? 바울은 성도들의 교만한 말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경건의 능력을 보기 원했습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대로 만약 그들이 시기와 분쟁 가운데 거했다면,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기 원합니다.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바울의 권면을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관리하고,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제가 복음으로써 성도들을 낳고, 그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복음의 확신과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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