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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 '죽음을 직면할 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5-25 05:00

예심교회 신아브라함 선교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죽음을 직면할 때
  
성경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죽음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만큼 어려운 주제도 없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고 산 사람은 죽음을 아직 경험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딱히 죽음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면 그 경험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므로 산 사람은 죽음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죽는 사람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산 사람은 죽음이 와닿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식은 죽음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아는 것에 그친다.

속담에  '남의 죽음은 나의 고뿔만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무리 사람이 내 옆에서 죽어 나가도 죽음에 대해서는 깨닫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죽음을 실감나게 생각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을 직면했을 때이다. 불치병에 걸리거나 치명상을 입어 머지않아 죽게 될 때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기근의 때에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다가온다 해도 역시 살아 있는 동안의 고통이지 죽음 자체를 경험하거나 안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람이 죽음을 직면하여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이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13-21)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했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사38:9-21)

그리고 두 번째는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욕하며 회개하지 않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경우이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사22:12,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계9:13)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9:20,21)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16:8-11)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을 결산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또한 죽음을 직면하는 때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때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모두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은 삶을 진지하게 하는 면이 있으나 모두에게 지혜를 주지는 않는다.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반면 히스기야나, 집 나간 탕자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돌이키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태초 이래로 죽음은 항상 있어왔고, 오늘 이 순간도 죽음의 소식은 끊이질 않는다.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죽음의 소식이 자주 들려오느냐 죽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냐 하는 정도일 뿐이다.

죽음의 소식이 속담처럼 남의 죽음은 나의 고뿔만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온다고 믿고, 그 죽음이 오늘이나 내일 올 것처럼 의식하며 산다면 히스기야나 탕자처럼 회개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직면해서도 계시록의 회개치 않는 사람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죽음 자체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이 진지해 질 것이며 하나님을 찾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삼상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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