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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5-25 05:00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린도전서 8:1-13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where?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우리교회가 속한 보셀 시의 한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보셀시 인구수에 비해 교회가 아주 많다며, 이는 미국 사회에서 매우 드문 경우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 중 하나인 우리 교회가 이 지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그는 가장 작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천천히 운전하세요!” 주일이면 교회로 향하는 차량이 사방에서 보셀 시내를 통과하는데, 운전자가 동양인일 경우 대부분이 우리 교회를 떠올린다고 했습니다. “배려하며 운전하는 것, 조금 기다려 주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교회가 우리 보셀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순간 급하게 운전대를 잡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배려가 때로는 적극적인 헌신이 될 수 있구나!’
-출처: 권준, 「교회만 다니지 말고 교회가 되라」(서울: 두란노, 2014);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2년 5월호), 115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방금 전에 보셀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는 고린도 지역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예로부터 해양교통과 상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대개 항구도시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많습니다. 고린도 사람들도 막대한 자금을 들여 대규모로 우상에게 제사 지낼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지낸 후에 고기 대부분을 시장에 싼값으로 내다 팔았습니다. 하지만 일부 고기들은 집주인이 사람들을 초청해서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 초청받은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고기를 먹어야 할까요, 먹지 말아야 할까요? 이 문제를 놓고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우상에게 드렸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은 제물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음식입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지식으로 인해 최소한 먹는 문제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장성한 자들이고,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성만찬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후 바울은 육신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바울은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자! 교회 안에 같은 사안을 두고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서로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고 나란히 평행선을 긋습니다. 자!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요?

why?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진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아디아포라’(adiaphora) 논쟁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는 그리스어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에서 명백하게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영역, 문화적이거나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는 가운을 입어야 하느냐, 입지 말아야 하느냐도 아디아포라의 영역입니다. 목회자 개인마다 입거나 입지 않는 것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지 않는다고 정죄하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서 연약한 지체가 근심하고 시험에 든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출처: 이재훈,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서울: 두란노, 2018);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2년 5월호), 103에서 재인용.

바울도 우상에게 드렸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음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8절).

음식은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믿음이 강한 성도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9절).

여기서 “너희의 자유”를 “너희의 권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것을 먹던, 먹지 않던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권리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강한 자의 권리가 믿음이 약한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약한 자들은 신앙생활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집사님은 명절 때만 되면 고민이 많습니다. 평상시에는 기도도 많이 하고, 예배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명절 때만 되면 이분의 꿈자리가 사납습니다. 자꾸 돌아가신 분들이 이 분의 꿈에 나타나서 “아이고, 배고 파라. 아이고, 배고 파라.”하고 외쳐댑니다.

어떤 때에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나고, 어떤 때에는 죽은 남편이 나타나고, 매번 등장인물이 바뀌면서 나타나 배고프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명절 때만 되면 고심이 많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중인데, 명절 때만 되면 이 집사님의 얼굴이 완전히 죽을 판입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는 이 분이 꾀를 냈습니다. 이 집사님은 명절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쪽 귀퉁이에다가 뻑적지근한 제사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밥 위에다가 큼지막하게 열십자로 십자가를 그려놓았습니다. 조상도 배 불리고, 하나님도 섬겨야 하니 이렇게라도 해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우리 성도들이 겪는 마음의 고충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까지 했겠나 싶습니다. 이게 어디 제사 문제뿐이겠습니까?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첩 문제로,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문제로, 후에는 사상문제로, 주초문제로, 또 지금은 낙태문제며, 동성애 문제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들어서는 순간, 걸리는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내가 교회 나가면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고, 제사도 못 드리니까 나는 교회에 절대로 안 나갑니다.”하고는 아예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딱 걸어 잠그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현실적이고,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성경적 견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 입장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만일 지식 있는 그들이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믿음이 연약한 자가 본다면, 그들도 양심의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습니까? 그런즉 그들의 지식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멸망하게 될 터인데, 문제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지식 있는 자가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여 형제에게 죄를 짓는다면, 이는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만일 음식이 자신의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합니다(13절).

what?

그렇다면 지식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저희에게 조직신학을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이 한 날은 수업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조금 안다고 까부는 게 아닙니다.” 이 교수님은 대단한 학자이셨는데도 늘 조심해서 말하고, 조심해서 행동하셨습니다.

바울이 과연 무엇을 말하였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2절).”

바울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조금 안다고 까불지 마라. 너는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얕은 지식이 우리를 사람 앞에는 세워줄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하나님 앞에는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깊은 지식 위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조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조금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깊은 지식 위에 거해야 합니다.

둘째,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나의 자유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자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지식 위에 이웃사랑이 더해질 때 그 지식은 참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 위에 사랑을 더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권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웃사랑의 출발점이 됩니다.

how?

사실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에는 술과 담배를 허용했습니다. ‘불겅이’, ‘막초’라고 불렸던 담배를 사경회 중간 휴식 시간에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좌절하여 술독에 빠지고, 담배 골초가 되며, 도박을 하는 등 온 나라가 멍이 들 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살면 이 나라가 희망이 없다. 믿는 사람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0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7대 강령”이라는 지침서를 발간하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7대 강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예배출석 (2) 성수 주일 (3) 부모 효도 (4) 일부일처 (5) 인가귀도(가정을 인도하여 도에 이르게 한다. 즉 가정 복음화) (6) 근면 성실 (7) 금주 금연

1914년에는 “담배를 피우는 자는 절대로 장로로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선배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느냐? 술 마시면 죄라고 했느냐?”라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손에 쥔다면 그 사람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할 수 있는 자유,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면, 또한 내 곁의 형제를 실족시킬 수 있다면 그 형제를 위해서 내 권한과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나 중심이 아니라 이웃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옥성석, 「삶으로 읽는 로마서」(서울: 예책, 2021);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2년 5월호), 163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올바른 지식 위에 이웃을 향한 사랑을 더 해 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자유와 권리가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음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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