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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서울대학교 사범대 연구생./아시아뉴스통신 DB |
왜 비의는 조상과 사마의의 갈등을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요?
제가 장완보다 비의에 대해 더 집중하는 이유는, 이미 앞서 약간 비추기도 했습니다만, 비의가 제갈량 사후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의의 집권 기간은 장완 말년부터 상당한 기간에 걸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연희 6년(243년) 상서령에서 대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실세가 된 비의는 연희 9년(246년) 장완의 사망으로 집정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 시기 유선은 굉장히 괴이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선 자신의 상부(尙父)였던 제갈량의 추모를 강제적으로 틀어막고 있었고, 황호(黃皓)를 앞세워 내시 정치(內侍 政治), 또는 근신 정치(近臣 政治)를 시도하였으며, 다음 단독 집정 체제를 깨고 항장 출신인 강유(姜維)를 위장군으로 올리면서 녹상서사(錄尙書事)에 임명합니다.
이전까지 대장군이 승상부 폐지 후 유일 집권자의 상징이라는 점으로 보면 중요한 변화입니다.
건흥(建興)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사용한 연희(延熙)를 채택한 기간을 봐도, 자식이 부모를 애도하는 3년이라는 기간을 소요하고 있는 점도 그렇지요.
또 연호의 개원(改元)과 동시에, 유선은 자신과 동명이인인 아들 유선(劉璿)을 황태자로 세우는 등, 후계 구도를 튼실히 한 점도 그렇고, 바로 이 과정에서 장비의 둘째 딸을 황후로 추대하면서 등장하는 행승상사, 좌장군 향낭(行丞相事左將軍向朗), 즉, 승상의 일을 대행하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아시겠지만, 향낭은 마속의 후원을 해주지 않은 죄로 제갈량에 의해 면직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관직에 제수된 이유는 ‘옛 공을 생각해서(追論舊功)’이었고, 면직된 이후 20년 동안 공부에 매진하여 “위로 집정부터 아래로 젊은 유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경하고 우대하였다(上自執政,下及童冠,皆敬重焉)”는 기록도 존재하니 매우 의미심장하지요.
연희 10년(247년) 사망 즈음에 이미 80세를 넘겼다고 하니(年踰八十) 굉장히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제가 이렇게 유선의 행보에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비의의 행보 뒤에 유선의 ‘석연치 않은 모습들’이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심층적으로 게재하는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선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게 제갈량의 그림자를 지워가면서 잃었던 권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비의는 그런 유선의 등장에 아주 좋은 인물이었는데, 재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완벽주의가 지나치고 결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죠.
여기에 진지(陳祗)와 황호(黃皓)의 결탁까지 이루어지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이용해 제갈량과 유비의 유업이었던 ‘북벌’을 축소하였던 것입니다.
안전보신주의의 확산이 바로 이 지점에서 확산되었던 것이지요.
항장인 강유는, 비록 집정에 임명되기는 하였지만, 비의에게 철저하게 견제를 당하고 있었지요.
바로 이 강유의 정치적 후원자가 제갈량이었습니다.
또 장완과 비의 중 제갈량의 유업을 잇는 데 주력한 인물도 장완이었고요.
이 모든 정황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너무 괴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선은 ‘북벌’을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으로 인식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하필 거기에 비의가 장단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강유의 실패를 단순히 그의 역량 부족으로 몰아가는 데 저는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입니다.
특별히 유선과 비의 중 비의에게 더 큰 죄를 묻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제갈량의 후원으로 정계에서 자리를 잡은 비의가 정작 그 사업을 축소하고 황제와 더불어 안전보신을 추구했다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면 말입니다.
그나마 제갈량의 영향을 관성적으로 받으면서 세력을 유지하던 계한은 바로 이 시점부터 서서히 하락세를 그리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비의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서든 이 잡은 기회를 지키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주로 내정 쪽에 힘을 부식하면서 항장 강유를 고립시켜왔던 것이지요.
왠지 권력의지가 읽히는 대목입니다.
한 가지 더 추정을 하자면 유선이 급격히 제갈량의 후광을 지우려고 시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유선은 언제부터 제갈량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그의 유업에 관해 큰 불만을 드러내면서 권력 탈환에 혈안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능력과 노력 부재를 간과한 채 벌인 이런 행각들이 하필 비의와 만나면서 꼬인 것 – 계한의 멸망은 바로 제갈량을 잃으면서 이미 시작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