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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고양 하늘의기쁨교회 양봉식 목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4-22 12:49

고양 하늘의기쁨교회 양봉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말을 듣지 않는 것)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하나님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변화가 없다면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듣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그것은 더러운 것과 악(말을 듣지 않는 것)을 내버리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더러운 것’은 세상 것으로 물이 들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방탕하고 타락하여 변태적 쾌락을 추구하는 태도를 뜻한다고 데릭 프린스는 말했다. 이런 태도는 마음과 심령의 문을 꼭꼭 닫아버려 구원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이런 상황이 믿는 자들보다 더 심하다.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는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거절하는 자신 안의 더러운 것들 때문이다. 
고집이 쎄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두드러진다. 야고보가 “넘치는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집스러워 남의 말을 듣지 않은 어린 아이의 못된 태도를 의미한다.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반박하거나 말대꾸하는 어린 아이들을 두고 못된 아이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주 발견하다. 특히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런 빈정거리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욥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바울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

세상을 추구하는 이들, 세상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안정감을 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다. 더구나 더러운 것을 추구하는 태도, 하나님을 향해 악한 감정과 말을 하는 이들은 그 마음과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야고보는 그와 반대되는 “온유함”로 대할 것을 권한다.

‘엔 프라우테티’는 헬라어는 온유한 가운데, 유화함, 상냥함, 친절한 태도, 삼가함, 인내, 자제, 참음, 관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온유함이란 겸손한 태도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빈정거리고 하는 말을 반대하고 시비를 하는데 이런 것과 반대되는 의미가 온유함이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태도와 결부된 것이다. 온유함이 특성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부르는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온유함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경외하고 존중하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유함이란 사랑하는 마음이나 존중하는 마음이다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축복과 삶의 유익을 얻는 일이다. 시편은 이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편 25장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의 가르침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두 가지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온유함과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이것은 야보고가 더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과 넘치는 악을 추구하는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태도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이것은 곡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내적인 본성과 성품을 열어서 보여주며,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각각 다른 형태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분별한다는 의미이다. 말씀이 긍정으로만 반응하지 않고 부정으로도 반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복음에는 차별이나 차이가 전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똑같이 전파되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 있었던 스데반의 순교 사건에서 그것을 잘 엿볼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각종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또 회당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며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스데반을 당하지 못했다(행 6:10). 결국 거짓증인을 내세워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해서 공회 앞에 서게 했다.

스데반은 고소하는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복음을 전했다(행 7장).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구약에서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음을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은 반응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스데반을 순교의 자리에 가도록 했다.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중요할 수 있다. 세상에 찌들어 사는 사람, 오직 자신의 욕구만을 위해 사는 사람, 세상 것에 아주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복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복음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되어 실제로 그 사람들이 삶에서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활력이 있고, 좌우의 날선 검보다 예리하교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고 그 사람의 생각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찔러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선지자를 죽였다.
반면 어떤 사람은 복음을 통해 자신의 실상, 즉 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분을 찾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찾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0장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러 온 검은 불화를 가져온다. 믿는 자에게는 화평이지만 복음을 믿지 않는 경우 불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부모와 불화하고 형제와 불화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복음은 세상을 뒤흔든다. 이슬람에서 복음을 믿게 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이 드러날 때 이슬람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진리를 거절하는 이들은 그 마음에 복음이 들어서면 그것을 수용할 자리가 없다.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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