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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목신학원 조태성 교수.(사진제공=새생명교회) |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눅8:22-23)
1. <예수님을 주무시게 만든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시간이 부족하시다.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 부지런히 사셨다. 예수님 사전에 낮잠은 없다. 그러나 단 한 번 낮잠을 주무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상하다. 이해 안된다.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기르치시거나 훈련시키셔야 하는데 그냥 주무신다. 이유가 뭘까?
우리가 사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늘의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거의 땅의 일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땅의 일들, 육신적인 것들은 생명이 없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2.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아무리 설명하셔도 제자들은 관심 없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아직까지는 영의 생각보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처럼 육신의 일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땅의 일들에 관심이 많다. 그 결과 기복신앙에 빠져 늘 이런 이야기들이 화제 거리다.
“누가 더 큰 제자인가?”
“예수님께서 왕국을 세우시면 누가 총리가 될 것인가?”
“오늘은 누가 더 예수님의 사역을 잘 도와서 주님께 높은 점수를 받았는가?
“오늘 나를 통해서는 이런 기적이 나타났는데 너희들은 어땠냐?”
“이번 전도여행에서 나는 이런 병을 고쳤는데 너는 얼마나 대단한 은사가 나타났냐?”
3. 제자들은 평상시에 이런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육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 배에 올라타서도 직전에 나타난 축복과 기적들을 이야기 하느라 정신없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흥분한다. 소리를 높이기 바쁘다. 그 가운데 자신들이 수제자들 그룹에 속해있다는 자부심을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일들, 영의 생각들에 주목하신다. 반면 제자들이 떠드는 내용들은 온통 육신에 속한 생각들, 땅의 일들이므로 주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셨다. 말씀하신들 알아들을 영적 수준이 준비되지도 않았음을 아셨다. 그 결과 차라리 몸의 안정감이라도 회복하시고자 조용히 주무실 수밖에 없으셨다. 지금 상황에서는 낮잠이 최선이셨던 거다.
4. 우리는 제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더 잘하지 못한다. 사실 우리도 주님을 주무시게 만들었던 제자들과 마찬가지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만이 시대적으로 크게 쓰임 받는 교회다.”
“우리 목사님만이 시대적으로 특별하게 선택받은 사도요 선지자다.”
“우리 교회를 마지막 시대에 특별히 선택하셔서 사용하신다. 마지막 시대에 신앙 잘 지키려면 다른 교회 성도들도 우리 교회 와야 한다.”
“우리 교회에 오면 100% 정확한 하나님 음성을 받을 수 있다.”
“우리 교회, 기도원에 오면 못 고치는 질병이 없다.”
5.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기적 자체만을 이야기한다. 사역자와 교회, 기도원 홍보하느라 정신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영혼구원과 심령의 변화에 관심이 있으신대 그들은 기적에만 관심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에 관심이 있으신대 그들은 “어떤 기적이 나타날까?”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자랑할 거리, 홍보할 거리가 나타날수록 자랑하느라 정작 예수님 자체를 놓친다. 은사는 후회하심이 없기에 더 나타나고 계속 나타날지 모르지만 그 교회에서 점점 예수님께서는 소외되시기 시작하신다. 그러다가 결국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기 시작하신다.
가장 큰 문제는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역 가운데 더 이상 예수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한다. 주님을 놓치고 계속 사역을 진행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영들이 더 자극적인 느낌과 기적을 주면서 자신이 하나님인척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시작한다. 나는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관계에 이 말씀을 적용하게 된다.
6. 나부터만 하더라도 목회자로서 사역을 한답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놓친다. 순간순간 사역의 현장이라는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성령님을 놓칠 때가 있다. 가정이라는 배 위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즐겁게 식사하고 여가와 쉼을 누리지만 정작 그 시간에 성령님을 놓친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성령님을 놓친다. 내 생각과 분주함 때문에 곁에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존중해 드리는데 있어서 소홀할 때가 있다.
내 할 일에 열심을 내느라 동행하시는 성령님과 교제 나누고 소통하는 것을 놓칠 때가 있다. 아니, 그분께서 나와 함께하심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루는 출판사 정기모임을 인도하러 지하철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가끔 내가 별로 노력하지 않았는데 구원의 감동, 큰 은혜로 먼저 채워주실 때가 있다. 이동중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은혜가 임한다. 그러니 성령님께 집중이 잘 된다.
“성령님. 지하철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빈자리도 있고 참 조용하네요. 저 사람은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요? 성령님. 더욱 함께 계심을 나타내주세요.”
7. 이렇게 내 나름대로 지하철에서 마음과 생각가운데 성령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뢰면서 교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신당역에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지나쳐서 약수역까지 갔다. 성령님께 집중하느라 약수역에서 3호선이 들어오고 있을 때에야 잘못 환승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차! 잘못 내렸다.’ 성령님. 어쩌면 좋지요. 돌아가게 생겼네요. 제가 성령님께 집중하고 존중해드린다면서 그만 환승역을 놓치고 다른 곳에 왔어요.”
물론 3호선을 타고 가도 조금 돌아가는 것이기에 크게 상관 없다. 20분 정도 차이가 나지만 워낙 일찍 출발하기에 늘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8. 이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환승역을 지나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거다. 그래도 실수가 의미 있다.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존중해드리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실수했기 때문에 그 실수까지도 의미가 있다. 만약 성령님을 존중해드리지 못하면서 신당역에서 올바르게 환승했다면, 그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리라.
하루는 잠실역에서 8호선으로 환승하는 중이었다. 환승하는 곳까지 거리가 3-5분 정도 걸리는데 통로가 살짝 내리막길처럼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마음을 두드리신다. 세미한 감동을 주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태성아, 천천히 가자.”
9. 아차! 또 성령님을 존중해드리지 못하고 나 혼자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네.
“성령님. 죄송해요. 제가 또 성령님을 놓치고 혼자 열심히 걷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제 마음을 두드려주셔서 성령님을 다시금 존중해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성령님께서 “천천히 가자.”고 세미한 감동으로 사인 주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내 발걸음이 빠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도를 늦춰라.”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거다. 앞에서 내가 성령님께 고백 드린 것처럼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성령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상황인 거다. 그래서 “천천히 가자.”는 감동은 이런 의미다.
“태성아.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해라. 네가 나와 함께 가고 있음을 기억해라. 그리고 나와 이야기 나누면서 친밀하게 동행하자.”
10. 직장이라는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성령님을 주무시게 하지 말라. 성령님 주무시기 전에 대화를 요청하라.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자. 그분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부탁드리자. 교제 가운데 일하시기 바란다. 일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성령님과 함께함이 더 의미있지 않겠는가.
가정이라는 배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자주, 계속, 끊임없이 그분께 대화를 요청하자. 여러분 각자의 일터와 삶의 현장이라는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성령님을 순간마다 존중해드리라. 여러분의 신앙공동체라는 배 타고 계신 성령님을 바라보시고 존중해드리라. 가령 이렇게 부탁드리며 시도해보라.
“사랑하는 성령님. 오늘도 이곳에 임재 하셔서 일터의 주인 되어 주세요.”
“성령님. 거래처에 언제 전화하면 좋을까요?”
“성령님. 이제 점심 시간인데 무엇을 먹을까요?”
“성령님. 고객들과 전화하는데 제가 어떻게 말하고 대화해야 할까요?”
11. 친한 친구들이나 교회 성도들과의 만남 가운데서도 성령님을 의식하시고자 힘쓰자. 대화 가운데서도 순간마다 마음과 생각으로 성령님께 아뢰고 여쭤보자. 그분께서 존중을 받으시고 계심을 느끼실 수 있도록 노력하자.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시는 분들일수록 사역 자체에 열심을 내느라 성령님을 잊지 마시길 부탁드린다. 사역때문에 성령님 주무시게 만들면 안되리라.
슬기로운 신앙생활, 슬기로운 가정생활, 슬기로운 직장생활 되기를 사모하고 추구하자. 모든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성령님을 존중해드리자. 성령님께 마음과 생각으로도 자주 말을 걸자. 대화를 시도하자. 질문을 드리자. 이것이 성령님을 주무시지 않게 하는 거다. 이것이 이 땅에서도 누리는 슬기로운 천국생활이리라.
12.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성령님께 여쭤보아도 일일이 대답치 않으신다. 우리를 로봇처럼 일일이 지시하셔서 복종하도록 조종하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질문과 대화의 시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분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의 확인이다. 많은 경우 성령님의 임재를 나타내주시면서 “그래.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단다.”라고 확인시켜 주시는 거다.
이런 슬기로운 천국생활을 누릴수록 성령님께서 잠드시지 않으신다. 오늘도 보다 많은 분들이 영적으로 성령님을 주무시지 않도록 존중해드리는 삶을 추구하시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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