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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목신학원 조태성 교수.(사진제공=새생명교회) |
1. 큰 딸 한별이가 자다가 신음소리를 내며 낑낑댄다. 악몽을 꾸나 보다. 나는 거실에서 성령님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다 말고 후다닥 한별이에게 간다.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어깨와 팔을 토닥토닥 해주며 이야기 한다.
“한별아 한별아, 아빠 왔어. 걱정하지마. 악몽을 꿨나보구나. 그냥 꿈이니까 무서워하지 마. 아빠가 옆에 있어.”
2. 아빠 목소리가 들리고 잠에서 살짝 깼나보다. 눈을 뜨진 않았지만 살짝 웃는다.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민망하기도 한가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악몽 같은 문제가 다가온다. 직장문제가 악몽으로 다가온다. 자녀문제, 배우자의 문제가 악몽으로 다가온다. 지금 코로나19로 가정경제의 어려움이 악몽으로 다가온다. 악몽같은 문제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그러나 감사한 것이 있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악몽과 비교할 수 없는 실재이며 현실이라는 진리다. 그래서 악몽같은 문제가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크신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다독여주시고 어루만지신다. 악몽에서 흔들어 깨우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
3. “내 사랑아, 너는 내 안에 있단다. 언제나 내가 동행하며 지키리니 담대하라. 두려워말라.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 영적전투에서 승리하리라. 문제보다 실재인 나를 바라보라.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진짜가 아니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것이 진리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인생문제와 고통이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큰 고난이 와도 대수롭지 않게 믿음으로 반응한다. 어떤 사람은 작은 고통에도 쉽게 시험에 든다. 믿음이 없는 것처럼 반응한다. 무슨 차이일까?
4. 생명으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믿어지느냐 믿어지지 않느냐의 차이다. 그 결과 세상 끝날까지 성령님을 통해 동행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느냐 믿어지지 않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훈련할수록 그런 믿음, 영적 여유를 가지게 된다.
아프리카 케냐의 국립공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광한다. 다양한 종류의 짐승들과 맹수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재미있는 점을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을 태운 차량이 접근하면 대부분의 동물들은 경계하며 긴장한다. 다가가면 도망가기 바쁘다.
5. 그런데 사자들은 다르다. 차가 근처에 접근해도,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어도 무시한다. 하품하며 드러눕는다. 졸다가 그냥 잔다. 누군가의 고백처럼 그런 사자의 여유가 참 멋져보였다. 어찌 보면 관광객들이 열광하며 카메라 플래시 좀 터뜨려주면 “어흥~! 그래, 나 사자야~!”하며 교만해질 법도 한데, 일체 반응하지 않는다.
사자는 자신이 사자라는 정체성이 확실하다.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잘 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존재다. 성령님을 통해 친밀하게 동행하시는 존재다. 그런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으로 우리가 무장되어 여유있게 반응해야 한다.
6.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다가오면 그런 여유를 잃어버리곤 한다. 자꾸만 나 혼자 고통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며 긴장하고 경계한다. 나도 종종 경험한다. 왜 그리도 이따금씩 외롭고 답답함을 느끼는지 모른다. 내가 이렇게 편협하고 속 좁은 사람이었나 싶다. 그래서 성령님께 한 번씩 푸념섞인 질문을 드린다.
“사랑하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저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항상 동행하시는데 저는 왜 외로울까요? 왜 슬프고 우울함을 느낄까요? 왜 이렇게 분노와 짜증이 올라오고 또 어찌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까요? 왜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마음에 담아두고 감정소비를 하고 있을까요?”
7.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기분과 감정도 성령님께 아뢰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있으면 이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헨리 나우웬이 어떤 모임에 참석했을 때, 같은 테이블에 있던 한 여인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8. “자매님이 불평하시는 그런 모든 일들은 모두 정말로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당신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 어떤 관계에 있으십니까? 2주 동안 매일 5분씩 조용히 앉아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기도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간구해 보십시오. 그리고 난 후에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매순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해도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헛것이다.
9.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는 그 어떤 선행도, 예배도, 다 자기 만족일 뿐이다. 성령님 놓치고 여유 없이 그분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한들 자기 만족일 뿐이다. 나의 노력을 주변에서 칭찬해주고 내 삶과 사역이 성장해도 성령님을 놓친다면 영적 비만일 뿐이다. 다 자기 의요. 자기 자랑일 뿐이다.
한 번은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께서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이런 간증을 하셨다.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임한지 2년 만에 교인을 3배나 성장시켜 600여명이 되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이 허전하다. 사역 속에서 무언가 주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2주 정도 목회를 중단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금식과 기도, 묵상에 전념하게 된다. 그때 성령님의 충격적인 음성을 듣는다.
10.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 보겠는냐?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것이다.>
11.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살이 쪄서 영적 비만이 되어가고 있는가? 내 삶에서 그 기준은 사역보다 성령님이시다. 사역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하는 삶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예수님을, 성령님을 만나는가? 날마다 성령님의 사상과 생각인 말씀을 따라 하루를 살아가는가? 복음적인 순종의 기쁨을 누리는가? 잠자리에 들 때에 그분의 품안에서 쉬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어떤 부자도 어떤 권력가도, 어떤 유명한 사람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12.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삶이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하여 먼저는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요. 우리도 성령님을 사랑하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하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언제나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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