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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종말 신앙과 감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12-27 05:00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종말 신앙과 감사(데살로니가전서 5:1∼22)

[1]
기쁨과 즐거움은 성격이 다릅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건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이뤄졌고 앞으로 이뤄질 구원을 생각하면서, 내일의 거룩함을 오늘로 가져와 기뻐하는 건 크리스천의 선한 의지가 들어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고 난 후에야 기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형 동사로 말했고(16절), 이를 감사와 연결했습니다(18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선한 일이 생긴다는 바울의 말이 억지 춘향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게 신앙의 선조가 우리에게 전해 준 삶의 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언약을 받았으니 이 기쁨을 능가하는 어려움이 해 아래 세상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 약속을 먼저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잠시는 즐겁지 않더라도 곧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2]
종말 신앙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사물과 사람을 모두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이 끝난 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고 멀리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표현처럼 해 아래의 세상만 보는 게 아니라, 바울이 말한 해 위의 것까지 바라보고 내게 주어진 현실을 해석하는 게 종말 신앙입니다. 그래서 종말 신앙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 앞에서 모든 걸 판단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에게 주어질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그 사람을 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봤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분을 세 번 부인할 걸 아시고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경솔하게 예수님을 자신이 가진 현재의 시각으로만 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가시자 그 길로 가지 말라고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게 복음서가 들려주는 종말 신앙의 한 모습입니다.

[3]
바울은 종말 신앙을 갖지 못해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라고 했습니다(14절). 이는 군인이 행군대형을 갖춰 앞으로 가는 행렬에서 벗어난 모습입니다. 군대의 행렬에서 혼자만 벗어나 있으니 얼마나 보기 흉하겠습니까? 이처럼 종말이 가져올 정렬된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게 어둠의 세력입니다. 만약 교회에 제대로 된 종말 신앙이 없으면, 현재에 주어진 것에만 감사하게 됩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화로운 구원에는 미처 감사의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럼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세상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고, 궁극적으로 성경에서 말한 신앙인의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는 절대로 성경이 말한 올바른 감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감사에 구원의 질서를 따르는 성화가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4]
바울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라고 했는데(14절), 마음이 약한 건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했고(고린도후서 11:30), 예수님도 약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변명 한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 욕하는 사람들, 침 뱉는 사람들, 끊임없이 때리고 채찍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얼굴을 붉히지 않으셨고 오히려 저들을 축복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을 느꼈을 때, 내가 이런 상황인데도 값없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고마워 종말 신앙에 바탕을 둔 채 감사할 수 있습니다.

[5]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건 종말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감사와 기쁨의 기도입니다. 만약 종말 신앙이 없으면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16∼18절)는 말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와 강압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나 종말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건 크리스천이 꼭 수행해야 하는 신앙의 덕목입니다. 내 삶을 멀리 내다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성숙해져 가고 있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감사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풍요가 채워졌다고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건 종말 신앙이 말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약속받았고, 그 언약대로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걸 확인해야 바울이 말했던 감사와 기도가 나옵니다.

[6]
산을 찾은 사람들은 산과 골짜기를 보면서 거기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고, 더 나아가 보이는 것의 전체를 아름답다고 예찬합니다. 그런데 이는 산과 일정한 거리를 뒀을 때 보이는 아름다움입니다. 직접 산속으로 들어가 산과 골짜기가 지닌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온갖 벌레와 야생동물이 수시로 인간을 위협하는 환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일정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봤을 때는 아름답게 보였던 나무지만, 직접 그 밑으로 가보니 온갖 벌레가 가득합니다. 아름답다고 말했던 산이 만들어낸 현장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면, 온갖 생물이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는 현장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감사는 산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듯이, 종말 신앙을 가지고 내 삶의 현장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반대로, 내 삶에서 일어난 일을 돋보기나 현미경을 들이대, 내가 원했던 게 얼마나 이뤄졌는지 엄청 자세하게 따지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제대로 된 감사가 나오기 힘들고, 단편적인 감사만 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드려야 할 종말론적 감사가 아닙니다.

[7]
<16절>에서 말한 기쁨은 슬픔과 대조됩니다. 사람의 슬픔과 슬픈 일들은 죄의 결과이고, 죄용서와 구원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 증거로 성령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지 못했으면 성령님이 동행하시지 않기에, 이게 있으면 <전도서>에서 말한 해 아래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일상생활의 조건 때문이라면, 이건 늘 변하기에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항상’이란 단어를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이 베풀어 주신 구원이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의 토대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육신이 건강할 때뿐 아니라 아플 때도, 가정생활에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마음이 평안할 때뿐 아니라 고난 중에 있을 때도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시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8]  
이렇게 감사하려고 하면 어둠의 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고, ‘그렇게 살아봤자 허무한 것’이라고 우리 귀에 대고 속삭이면서 유혹합니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17∼18절). 성경공부는 기도와 감사의 방향이 삐뚤어지지 않도록 크리스천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게 예수님 안에서 크리스천에게 바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18절). 우리가 제대로 감사하기 위해 성령님의 은혜를 소멸하지 말고(19절),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20절). 예언을 기록한 책이 우리가 읽는 성경이기에 크리스천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와 감사를 분별하기 힘듭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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