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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부활의 시기'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4-17 04:00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부활의 시기(요한계시록 6:9∼17)

[1]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지침 중 하나는 모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아는 걸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숨기시는 게 있기에(이사야 45:15)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봐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몸의 정체를 인간은 모릅니다. 그 몸의 구성 성분이 뭔지 모르고, 영에 관해서도 영이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영이 동양에서 말한 기(氣)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실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영이 분명히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고 그걸로 우리가 살고 있지만 다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구원을 약속받았다는 사실이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초점도 여기에 맞춰야 합니다. 모르는 부분에 집착해서 자의적 해석을 한 후 그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면 안 됩니다. 알 수 없는 부분은 인간의 몫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남겨둬야 합니다.

[2]
성경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건 우리가 의외로 성경에 관해 아는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이란 성경의 기본 토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걸 토대로 아는 부분을 확장해 나가면서 <요한계시록>을 읽어야 합니다. 이걸 무시하고 모르는 부분에 집착해서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서로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6장>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이 재앙의 일곱 봉인을 <5장>에 나온 어린양이 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은 어린양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집행한 것입니다. <5장>에서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요한은 “울지마라”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슬픔에 대한 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가졌던 슬픔에 대한 답으로 등장한 분이 예수님이기에 그분에 관한 게 기독교 성경해석의 토대입니다.

[3]
<9ㆍ12절>에 다섯ㆍ여섯 번째 봉인을 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2개의 봉인은 앞부분에서 다룬 네 번째 봉인과 함께 사람의 죽음을 다룹니다. 그런데 각 봉인에서 언급한 죽음의 종류가 다릅니다. 네 번째 봉인에서는 청황색 죽음의 말이 나왔고, 이 말 뒤에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기 위해 지옥(하데스)이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9∼11절>에서는 두 번째로 이미 죽은 사람들의 호소가 이어집니다. 이들은 복음을 증언했다고 죽임당한 순교자들인데,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이들의 죽음이 특별하다고 했습니다. <12∼17절>에서 말한 세 번째 죽음은 최후의 순간까지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12∼14절>에 묘사된 것처럼 해 아래 세상이 날아가 버리니까 저들이 더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저들의 지위와 재산, 문명과 권력이 계속 계속될 줄 알았는데, 최후의 순간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남은 건 하나님의 심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누가 버텨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17절).

[4]
요한이 고발한 저들의 죽음은 <7∼8절>에 나온 죽음의 사자와 더불어 홀연히 다가온 것이지만, 크리스천의 죽음은 신앙 안에서 준비된 현실입니다. 크리스천은 이미 육신의 죽음 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들었고, 그 심판을 통해 구원받을 것이란 약속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이 찾아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거나 병에 걸려 갑자기 죽는 크리스천도 있습니다만, 예수님 안에서 잠든 성도는 이미 그들이 해야 할 싸움을 마친 사람들입니다. 쉴 시간이 주어졌기에 이들이 성령님의 은혜로 쉬는 것입니다(이사야 57:1∼2). 다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고 해도, 굳이 불필요한 일에 휘말려 죽음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신앙의 용기를 지닌 사람을 위한 것이지, 신앙을 핑계 삼아 만용을 부리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시간은 해 아래 세상에서 다 채우고 가야 합니다(디모데후서 4:6∼8).

[5]
다섯 번째 봉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증언으로 죽임당한 성도의 신원을 위한 탄식이 나옵니다. 순교자들이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10∼11절). 순교자들이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느냐고 물었고, 하나님은 언제까지라고 자세히 말씀하지 않고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11절), 일정한 숫자의 순교자가 차기까지 쉬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짐승의 피를 희생제물 삼아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 밑바닥에 쏟았습니다(레위기 4:7). “제단 아래(앞)”란 표현은(9절)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사고에서는 순교 당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쉬고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6]
순교자들은 하늘나라의 성전 제단 밑에서, 더는 위협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게 있습니다. 의인의 영혼이 하늘나라의 제단 밑에 있는 건 당시 유대교 랍비의 신앙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런 생각을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인용했습니다. 그는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죽임당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순교자들에게는 승리를 상징하는 “흰 두루마기”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이 수가 차기까지 쉬고 있어야 하는 건 이들을 핍박하는 세력에 의해서 순교자가 더 생길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할 근거를 차곡차곡 쌓으셨습니다(창세기 15:16). 그가 순교자를 핍박한 자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저들 배후에는 용ㆍ사탄ㆍ짐승이 있습니다. 또 그가 이 책을 썼던 시대의 상황으로 볼 때 사탄은 1차적으로 바빌론과 동일시되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이런 사탄의 세력과 저들에 속한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최종적인 결과로 일곱 심판 시리즈의 마지막인 대접심판에서 바빌론으로 상징된 로마제국의 파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저들의 심판을 말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의인들과 그들의 영혼, 의롭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드렸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받아서 심판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18:20, 19:1∼2).

[7]
여섯째 봉인을 뗄 때 심판의 영역이 땅과 우주로 확대됐습니다. 큰 지진이 나고 해ㆍ달ㆍ별의 기능이 현저하게 약해졌습니다. <12절>에 <이사야서 50:3>에만 나온 “하늘과 굵은 베(검은 천)”가 나오고, <14절>은 <이사야서 34:4>를 반영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늘과 두루마리가 함께 표현된 곳은 <이사야서>뿐입니다. 또 이건 묵시적 심판에 관한 묘사이기도 한데, <마가복음 13:24∼25, 마태복음 24:29>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ㆍ확장돼 악의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하늘마저 사라졌는데(14절), 땅에 사는 사람들이 동굴과 바위틈에 어떻게 숨을 수 있겠느냐?’라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늘로 대변되는 우주가 없어졌는데 지구만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은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걸 말합니다. 태양이 없어지고 별이 사라지게 될 걸 문자적으로 표현한 게 아닙니다. 우주를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노아언약)은 어느 시기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창세기 9:11). 이사야가 말했던 구약성경의 종말적 기대도 우주 보존 언약에 근거한 것이고(이사야 65:17∼25), 예레미야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언약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예레미야 31:35∼36; 33:20∼21ㆍ25).

[8]
성경을 오해한 사람들은 죽은 뒤에 곧바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다르고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활합니다(요한복음 5:29).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있고(사도행전 24:15), 부활 후에 구원과 심판이 인간을 기다립니다. <누가복음 20:38>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 살아 있습니다. 육신을 벗으나 벗지 않으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죽은 후에 부활하지 않고 사라지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심판하시겠습니까? 사라져서 아무런 형체도 없는 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인간을 부활시킨 후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거나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부활한 몸을 소마(body),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육신을 사르크스(flesh)로 구분합니다.

[9]
예수님은 인간이 받는 구원의 순서를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구원 순서는 세상에서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은 다음 부활해서 하나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부활->하늘나라 순으로 구원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은 예수님과 달리 아직 부활하지 못했기에, 부활이 여전히 이들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에 의해 장차 이뤄질 부활의 기쁨을 지금 우리가 사는 해 아래 세상에서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크리스천과 같은 상황입니다(고린도전서 15:50∼54). 신약성경은 구원의 완성체(完成體)와 과정체(過程體)를 같이 말하기에 우리가 이 둘을 차이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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