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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용 선생.(사진제공=보훈처) |
선생은 전북 마이산에서 거의해 '호남창의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고, 남원, 전주, 임실 등지에서 활약 중 체포되어 사형순국했다.
선생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됐다.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선생은, ‘의진약속’, ‘의령10조’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군율을 정비해 군경과 시설물을 공격하고,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 앞장섰다.
이후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을 비롯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끌다가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의령단(義靈壇)'을 설치해 전사한 의병들을 추모하고 전의를 가다듬었으며 일본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12년 겨울에는 비밀결사인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해 테라우치총독과 을사5적 및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등을 계획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불행히도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원수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당당히 재판에 임하였으며 1914년 4월 28일(음 4.4),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사형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