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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교회, 라오스에서 '김치 세미나' 개최

여선교회 중심의 21명의 성도들 한국음식으로 사랑의 마음 전해

(아시아뉴스통신= 김형준기자) 기사입력 : 2016년 02월 24일 18시 24분

 
구로동교회(담임 김길진 목사)는 지난 1월 24일부터 29일까지 라오스에서 담임목사와 함께 21명의 성도가 김치 세미나를 다녀왔다. 사진은 즐거웠던 김치축제의 한 장면. 비엔티안의 샤론국제학교에서 라오 여성들을 초청해 김치 만드는 것을 보여주고,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사진=필자 전정숙

구로동교회(담임목사 김길진)에서는 담임 김길진 목사를 포함한 성도 21명이 지난 1월 24일부터 1월 29일까지 김치 세미나와 우리 음식으로 베푸는 마을잔치를 위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라오스를 방문했습니다. 이 교회 전정숙 집사가 뜻 깊은 음식문화 교류의 현장을 다녀온 과정과 소감을 이곳에 자세히 게재합니다. 그녀는 이 여행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마음에 담아 온 여행이었고, 남을 위해 간 봉사 활동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가 회복되고 힐링되었던 여행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감동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라오스로의 출발, 그 설렘과 긴장 
 
1월 24일 주일 오후 5시, 4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집사님 권사님들로 이루어진 21명의 일행이 드디어 라오스의 비엔티안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 팀은 세 분을 빼곤 모두 여자 분들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이번 여행의 목적이 현지 샤론국제학교 이진숙 교장선생님의 주선으로 그곳 ‘라오 여성’(라오스 현지 여성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을 초대해서 우리 음식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 주고, 라오스에서도 가장 가난한 오지마을 ‘남떼’에 가서 마을주민들에게 떡볶이, 김밥, 잡채, 부침개, 김치, 라면 등의 우리 음식을 만들어 잔치를 베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요리에 대해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우신 어르신들이 많아서 특별히 각 선교회 회장단과 주방봉사팀, 안나기도특공대원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았다. 
 
나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라오스 봉사 신청 얘기가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데 막상 온전히 일주일을 비워야 하는 회사 일도 그렇고 이런저런 집안일 때문에도 괜한 욕심을 부린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을 기도하며 준비하는 동안 차차 라오스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런 후회나 걱정은 어느 새 사라지고, 내 안에 기대하는 마음이 하나둘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라오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라오스에 간다고 하자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던 걸 보면, 아직까지 라오스는 우리에게 낯선 나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우리 기업들이 진출해 있었고, 교민도 3천 명 가까이나 살고 있다고 했다. 수도 비엔티안 시내에서는 ‘엄마네’ 같은 우리음식 가게는 물론 K마트라는 한국음식 판매점도 있어서 우리 제품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었고, 요즘은 ‘꽃보다 남자’나 ‘용감한 가족’ 같은 TV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이제는 다른 동남아 나라들에서처럼 관광지에서는 간단한 우리말로 어려움 없이 흥정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담 없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샌드위치”, “10000낍으로 죽을 때까지 놀아라!” 같은 한글 문구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고, 한글 티셔츠나 한국 차들은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 주부터 시작된 한파는 출발 당일 최저 영하 16도를 찍었다.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내다 갑자기 체감온도가 영하 25를 훌쩍 넘어가니 나는 여름옷을 껴입고 가겠다던 당초 계획을 철회하고, 가벼운 긴팔 위에 돌돌 말아 넣을 수 있는 아들의 패딩을 빌려 입었다. 다른 분들도 겨울옷을 몇 겹씩 챙겨 입고 나왔다. 여름나라 라오스에 가면서 이 겨울옷들이 얼마나 짐이 될까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라오스에 도착해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우리는 주일인 24일 오전 2부 예배를 마치자마자 간단히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목사님께서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기를, 또 많은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 주시고 나니 약간의 긴장과 함께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렘과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정각 5시에 우리 일행은 라오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국제샤론학교에서 교인들과 라오스 주민들이 함께 기념사진./사진=필자 전정숙
 
■ 겨울나라 라오스? 한파를 몰고 간 우리 
 
드디어 밤 10시 15분, 약 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는 예정보다 한 시간쯤 늦게 비엔티안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비행기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비가 없는 건기라고 하더니 난데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씨도 한국 못지않게 춥고 바람까지 세찼다. 우리는 모두 벗어들었던 패딩점퍼를 곧바로 다시 끼어 입었다. 이게 뭔 일이지? 
 
예상치 못한 일은 공항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도 이어졌다. 보통은 비행기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지 않던가, 하지만 버스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배낭을 메고 가방을 끌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게이트로 연결된 통로까지 직접 걸어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에스컬레이터가 없고 계단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낡은 아파트 지하주차장 계단 같이 생긴 공항 계단에는 곳곳에 거미줄이 끼어 있고, 형광등에도 먼지가 수북했다. 와, 이게 국제공항이구나. 당황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다들 깔깔거렸다. 
 
우리가 묵었던 쏭강 옆 한 호텔에서 바라본 석양./사진=필자 전정숙

일행의 대부분이 나이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들이어서 허리나 무릎이 아프시거나 수술을 받았던 분들이 많아서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나와 몇몇 집사님들과 남자 분들이 어르신들을 밀고 끌고 하며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그곳 국제공항의 모습은 ‘우리의 시골 공항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했다. 이미 와 보셨던 분들이 ‘우리나라의 70년대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지만,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지든 내 예상을 넘는 일이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뜻밖의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이곳 샤론국제학교의 백규현 이사장님과 이진숙 교장선생님도 우리처럼 겨울패딩을 입고 나오셨던 것이다. 그러고는 “아니, 한국에서 한파까지 몰고 오시면 어떡해요?!” 하고 웃으셨다. 라오스에도 15년 만의 한파가 와서 아침저녁으론 너무 추워서 처음으로 패딩을 꺼내 입으셨다는데, 고작 영상 7~8도를 가지고 한파라는 표현까지 쓰시는 게 좀 의아했다. 그런데 이곳은 평상시 낮 기온이 25~30도, 밤에도 16도 정도여서 기온이 그 정도로만 내려가도 라오스 사람들의 피부는 동상에 걸릴 정도라는 교장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갔다. 게다가 마침 그날은 바람까지 세서 한파라는 말이 결코 과장도 아니었다. 
 
호텔 맞은 편에 있는 방가로 같은 숙박시설./사진=필자 전정숙

실제로 우리 일행이 라오스에 머무는 동안, 아래위로 길게 이어진 라오스의 북부지방에는 라오스 역사상 처음으로 눈이 내리고 얼음까지 얼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이상기온이 동남아에서까지 눈 구경을 할 수 있게 해 준 셈이다. 이상하게 추위에 적응해 온 우리조차 거기서는 라오스 사람이 된 것처럼 계속 오들오들 떨며 다녔다. 어떤 권사님은 우리 방으로 히터를 어떻게 켜는지 물어보러 오시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늘 덥다 보니 난방의 개념이라는 게 아예 없어서 보일러나 히터가 없었다. 단열시공도 당연히 되어 있지 않았다. 
 
마침 비까지 오니 호텔 방이 더 썰렁하게 느껴졌다. 호텔에는 별도의 담요도 몇 장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고육지책으로 우리는 입고 온 겨울바지를 벗지 못하고 다시 입고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도 추워서 심지어 패딩까지 껴입고서야 침대에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그날부터 날이 풀리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사나흘 동안 연거푸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호텔은 꽤 깔끔한 편이었다. 라오스에서는 최고급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호텔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낮은 층은 그나마 나았지만 맨 꼭대기인 6층의 우리 방은 마치 위풍이 센 시골집 온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게다가 옆방의 말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전화기도 먹통인데다 욕실에는 순간온수기가 달려 있었지만 더운 물이 안 나오는 방도 여럿 있었다. 나도 샤워를 하다가 찬물만 나와서 벌벌 떨면서 간신히 헹구고 나왔는데, 그 때문에 나와 한방을 썼던 집사님은 옆방으로 목욕 마실을 다녀오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예정된 8시에 호텔 식당에 가니 나와 룸메이트 집사님을 뺀 일행 모두는 벌써 아침 식사를 마친 뒤였다. 평생 새벽기도를 드리시는 목사님, 할머니 권사님 장로님들이시니 일찌감치 깨서 움직이셨던 모양이다. 새벽형 인간을 꿈으로만 꾸는 내겐 부럽기만 했다. 따끈한 차와 빵, 밥으로 평소 먹지도 않던 아침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나니 어느새 얼었던 몸이 녹아 있었다. 
 
■ 샤론국제학교, 앞선 교육프로그램으로 대기자가 1년을 기다릴 만큼 인기 
 
라오스의 샤론국제학교에서. 원어민교사와 100%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에서 꼬맹이들은 미국 원어민이라 해도 믿을 만큼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했다./사진=필자 전정숙

샤론국제학교에서 진행될 김치 세미나를 앞두고, 우리는 먼저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어린 꼬마들이 원어민교사와 100%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원어민 못지않은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며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 학교는 수도 비엔티안에 위치해 있는데다 프로젝터를 통해 인터넷 자료를 활용한 수업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심과 수준에 따라 나뉜 독특한 반 구성으로 학생들은 다른 학교와 겨뤄 2학년 이상 진급이 가능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라오스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비교해서도 교육 프로그램이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모집광고를 내지 않는데도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미리부터 영어공부를 준비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서 유치원 과정의 경우 1년 이상 대기자가 밀려 있다고도 한다. 
 
우리 회사(어린이아현)에서 만든 그림책 <찢어진 가방>과 <따뜻한그림백과> 몇 권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사장님께서 ‘색감이나 일러스트가 예쁜 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많지 않은데 너무 예쁘고 좋다.’며 고마워하셔서 가방 무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챙겨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사장님 부부께서 후원하는 국립대 한국어과 학생 대니얼에게 라오스 어로 바꿔서 아이들에게 꼭 읽어주라고 부탁했다. 샤론국제학교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보는 모습을 보니 이참에 음식 문화 교류를 넘어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가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스에서 그림책 출판사를 내는 일을 도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 김치 세미나로 두 나라가 하나 되다 
 
라오스 시장에서 보쌈용 고기를 사고 있는 구로동교회 교인들./사진=필자 전정숙

너무 ‘추웠던’ 여름나라 라오스에서의 첫 공식 일정은, 재래시장에 가서 김치와 보쌈거리를 사는 일이었다. 고춧가루와 젓갈은 서울에서 챙겨왔지만 나머지 배추와 무, 파, 양파, 마늘, 쪽파, 보쌈용 고기 같은 식재료들은 현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더 좋은 것은 비료가 너무 비싸서 일반 농가에서는 쓸 생각도 하지 못하니 라오스에서 나는 식재료들은 자연스럽게 유기농식품이 된다는 것이다. 날씨도 따뜻하니 이모작도 가능한데다 인위적으로 변형되거나 억지로 웃자라게 만든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를 먹을 수 있다니 부러웠다. 
 
비엔티안에 있는 재래시장은 규모가 제법 컸다. 입구에서부터 식용개구리를 비롯해 조잡한 장난감이나 액세서리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고, 들어갈수록 처음 보는 요상한 모양의 열대과일이나 향이 짙은 채소가게들이 즐비했다. 생고기를 골판지에 널어놓고 파는 고기가게들은 시장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채소는 양배추나 양파, 쪽파처럼 우리나라에서와 똑같은 것들도 많았지만, 배추는 우리 것보다 통이 작고 야들야들했고 무도 우리 무보다 길고 날씬했다. 80인분을 예상해서 장을 보느라 한 가게에서 사지 못하고 이 가게 저 가게를 다니다 보니 우리가 시장 물건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라오스 재래장에서. 유기농 채소들이 매우 신선해 보인다./사진=필자 전정숙

장을 다 봤을 무렵, 엄청난 양의 배추를 사는 우리를 보고 뒤늦게 주문했는지 배추를 더 들여놓는 가게들도 있었다. 우리가 이미 다 샀다고 고개를 저어 보이자 상인들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속상함이나 화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에이, 망했네, 뒷북 쳤어’ 하고 푸념이라도 했을 텐데 이 사람들은 정말 속도 없다 싶을 정도로 착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라오스를 조금 아는 사람들이 ‘라오스 사람들은 참 순수하고 착해.’ 하는 말을 했구나 싶었다. 
 
장을 볼 때는, 어르신들이 싱싱한 채소나 고기를 골라두면 샤론국제학교 이사장님이 따라다니며 흥정도 하고 그곳 화폐단위인 ‘낍’으로 환산해서 계산을 도와주셨다. 또 남자 분들과 젊은 분들은 그렇게 해서 산 물건들을 시장 밖에 있는 버스로 연신 날랐다. 그러는 사이, 나와 몇몇은 한 묶음에 2500원밖에 안 하는 녹두며 쥐눈이콩 같은 것을 깎아서 사기도 했다. 환율이 낮아서 ‘와, 그것밖에 안 해? 거저다 거저.’ 하면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하나 살 걸 두 개 사고 두 개 살 걸 세 개 샀다. 
 
그런데 물건을 사다가 모두가 웃음보를 터트린 일이 있었다. 가게 아가씨가 입은 옷에서 익숙한 글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선명한 파란색 점퍼에 “구의원 예비후보 정모모”라는 한글이 쓰여 있었던 것, 한국의 기초단체장 선거 때 예비후보로 나왔던 정 모모 씨의 선거운동원이 재활용수거함에 내다버린 옷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는가 보다. 너무 또렷한 한글 이름, 그것도 구의원 예비후보라니! 그 뒤로도 우리 눈에 자주 띄었던 한글, 라오스에서 만나는 한글은 무조건 반가움! 
 
라오스에서는 고기든 배추든 무든 다 개수를 세어서 팔지 않고 무게를 달아서 판다. 고기는 골판지 위에 생고기를 그대로 얹어서 팔았다. 더운 나라에서 냉장고도 없이 고기를 팔다니, 그래도 생고기라서 신선하겠다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교국가이지만 고기를 먹는다는 라오스에서는 소 돼지 닭들을 풀어서 키운다. 그래서 살이 찌지 않은 날씬한 소들이 길에 돌아다니거나 들에서 풀을 뜯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소는 말처럼 뛰어 다녀서 언뜻 뛰는 모습만 보고는 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라오스에서 먹어 본 고기는 기름기가 적고 맛이 좋은 것은 물론, 먹고 나서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장을 본 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러 유명하다는 쌀국수 식당에 갔다. 어르신들은 곁들여 나온 채소에 향이 센 고수가 같이 나와서 못 먹겠다며 서울에서부터 챙겨 오신 고추장이며 김치며 김 같은 반찬으로 속을 달래시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몇 분들은 어디서 무얼 먹든 다 잘 먹었다. 중국이나 동남아국가에 가면 독특한 향신료 때문에 아무 것도 못 먹고 고생하는 분들이 많다는데 내 경우엔 라오스 음식이 그다지 거북하지 않았다. 고기 요리도 보기에는 느끼할 것 같은데 막상 먹어보면 담백하고 부드러웠다. 또 어딜 가나 우리가 자주 먹는 상추가 나와서 더 좋았다. 덕분에 하루 두 끼만 먹고 살던 나는 라오스에서 날씬해져서 오기는커녕 세 끼 꼭꼭 챙겨먹고 다니면서 오히려 살이 더 쪄서 왔다. 
 
그런데 쌀국수 집에서 잊지 못할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내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일행이 식사를 하던 2층 바닥에서 갑자기 ‘두두두두’ 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식탁이 흔들리더니 바닥이 쩍 하고 갈라졌던 것이다. 거의 식사를 마치긴 했지만,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다들 놀라 허둥지둥 바깥으로 뛰어나와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그때는 지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갑작스런 추위로 2층 바닥의 타일이 얼어서 동파된 것이었다. 추위가 낯선 라오스에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 ‘경기(驚氣)’를 했던 것이다. 
 
절여 놓은 라오스 배추. 비료를 쓰지 않은 자연농법의 유기농이다. 포기가 작고 잎이 부드러워 한두 시간 만에도 금세 절여진다./사진=필자 전정숙

우리는 학교에 돌아와 곧장 김치 담글 준비를 했다. 마늘을 까고 생강과 양파 껍질을 벗기고 무채를 썰었다. 라오스 배추는 포기가 작고 잎이 부드러워서 한두 시간 만에도 절여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 배추를 절여서 어떻게 저녁에 김치를 담나 걱정스러웠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금세 절여졌다. 늘 넉넉히 음식을 나누는 것으로 알아주는 우리 교회의 어르신들은 워낙에 3백 명분이 넘는 식사도 거뜬히 해 오셔서 음식 준비를 착착 잘도 하셨다. 큰일에 익숙지 않은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물건을 찾아오거나 양파껍질 까기 같은 허드렛일을 거들거나 사진을 찍었다. 샤론국제학교에서 일하는 분들과 이사장님 부부의 후원으로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들도 와서 마늘 찧기나 쪽파 다듬기 같은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들은 일일이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럼없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보태고 우리가 필요한 걸 찾아주곤 했는데,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통했던 따뜻한 경험이었다. 
 
보쌈용 고기를 삶고, 절인 배추를 씻어서 건져 놓고, 식당의 탁자들을 넓게 붙여서 큰 비닐을 씌우고 배추 속 채울 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니 하나둘 라오 여성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그들에게 둘러 주고 헤어 캡도 씌워 주고 비닐장갑도 챙겨 주었다. 이어서 여장로님 한 분이 김치 담그는 법을 설명하자 국립대 한국어과 학생인 대니얼이 현지인들에게 라오스어로 통역을 했다. 대부분의 재료를 현지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 김치를 담가 볼 수 있도록 짠 맛이 강한 라오스 소금과 보드라운 배추에 맞게 레시피도 고쳐서 알려 주었다. 함께 속을 채우고 버무려 포기김치와 겉절이를 담아서 한쪽씩 가져갈 수 있게 비닐 백에 싸주었는데, 어떤 분이 환호성을 터트리는 바람에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정말 좋아하는구나!“ 
 
김치 세미나에서. 우리 김치를 담고 난 뒤 라오 여성들도 답례로 라오스 김치를 담아 보여 주는 장면./사진=필자 전정숙

우리 김치 담기를 마치자 라오 여성들도 답례로 라오스 김치를 만들어 보였다. 라오스 김치는 채칼로 파파야를 채를 쳐서 방울토마토와 마늘, 생강, 빨노초 색깔의 매운 고추와 생산젓갈, 레몬즙을 짜 넣고 절구에다 쿵쿵 찧어 만들었다. 그런데 김치를 만들면서 한 분이 어떤 노래를 선창하자 다른 사람들 모두가 신나게 따라 불렀다. 김치 담을 때 따로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다들 흥겹게 노래를 불러가며 만들어 준 덕분에 식당 안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드디어 식사 시간! 식탁은 우리 김치와 잡채, 보쌈, 절인 배춧잎에 새우젓, 계란탕, 밥 그리고 라오스 김치와 치킨 맛 나는 과자, 과일까지 풍성하게 차려졌다. 현지 젓갈의 독특한 맛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라오스 김치도 나름 먹을 만했다. 입이 열리면 마음까지 열린다고 했던가. 시간도 8시가 가까워져서 배도 적당히 고픈데다 기분까지 좋아서 저녁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눈빛 하나에 손짓발짓만으로도 다 통했던 우리는 맛있는 식탁의 교제를 통해 지구촌의 한 가족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날 나는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를 그렇게 기쁨으로 채웠다. 
 
■ 라오스 천혜의 보고, 소금마을 
 
이란 TV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라오스의 소금마을. 이들은 지하수에서 퍼올린 소금물을 자연건조하거나 가열해서 소금을 얻는다./사진=필자 전정숙

다음 날 우리가 찾아간 곳은 <용감한가족>이란 TV프로그램에 나왔던 소금마을이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중국,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에 둘러싸여 유일하게 바다가 없이 내륙으로만 이루어진 나라, 라오스! 그 때문에 소금을 어디에서고 얻을 수 없었다면 라오스는 타 국가에 짓눌려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지하수에서 퍼 올린 물을 자연건조하거나 가열해서 소금을 얻을 수 있다니......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마을에 도착해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 몇 명의 꼬마들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유럽의 길거리에서 자주 마주 치는 집시꼬마들처럼 행색이 초라했고 구걸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시간에 아이들이 왜 학교에도 가지 않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사탕이나 과자를 주었더니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며 아이들은 쉬지 않고 짧은 한국말을 읊어댔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많이 다녀가는 모양이었다. 라오스의 다른 데서 보았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들…. 내가 주머니에 있던 라오스 돈 천 낍(keep)을 꺼내 주려고 했더니 누군가 나쁜 버릇이 든다고 주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해주셨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지폐를 도로 집어넣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나 역시 양주의 한 시골마을에 살면서 가끔씩 미군 지프차가 지나갈 때면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 같이 먼지 날리는 차 뒤를 뛰어 따라가면서 “헬로 짭짭”, “헬로 깁 미 어 초콜렛!” 하고 외쳤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문득 아득한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미군들이 던져 준 군용 박스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딸기잼과 땅콩잼을 먹어보았다. ‘우리도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지.’ 나는 이 아이들도 언젠가는 우리처럼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물질적으로는 너무나 풍요해졌는데도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헬조선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이제는 시쳇말로 ‘3포 세대’를 넘어 연예,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구입, 희망, 꿈까지 포기한다는 ‘7포 세대’를 아파하며 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물질의 풍요함은 결코 행복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물질의 부를 누리는 것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언제까지나 순수하고 수줍어하며 욕심 부리지 않으며 자족하는 마음이기를, 그리하여 그것으로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오래도록 남을 수 있기를 바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난함이 불편한 그들에게 그것조차 내 짧은 생각에서 나온 욕심일지 모르겠지만. 
 
■ “선수들은 달랐다!” 오지마을 남떼에서 한국음식으로 베푼 마을잔치 
 
이튿날은 우리가 라오스에 온 중요한 일정의 하나인 오지마을 남떼에서의 마을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남떼마을은 라오스에서도 가장 가난한 카무이 종족이 사는 마을로, 수도 비엔띠안에서 차로 4시간이나 가야 하는 오지였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김치, 김밥, 떡볶이, 잡채, 부침개, 라면을 할 채비를 마치고 남떼로 출발했다. 
 
우리 일행이 타고 다니던 버스는 한국산 관광버스였다.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서 넘어온 물건들을 새로 바꾸거나 칠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그래서 시계는 고장 난 채 그대로였고 관리를 안했는지 안 그래도 험한 길에서 몇 번이나 엔진이 꺼져서 다시 켜기를 반복했다. 하도 여러 번 그러다 보니 우리도 적응이 되었는지 한국에서 같으면 벌써 내려도 열두 번 내렸을 텐데 누구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얼마 후 화장실을 가느라 잠깐 휴게소에 들렀는데, 장로님 권사님들이 사탕수수 주스도 사주시고 과자도 잔뜩 사서 나눠 주셨다. 그런데 차가 출발해서 다시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자 나는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메슥거려왔다. 다른 분들도 하나둘 멀미 때문에 토하거나 괴로워해서 자리를 바꾸고 등을 두드리고 하다가 결국 차를 잠깐 세워서 쉬고서야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남떼마을 사람들.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수가 많은데도 너무나 조용했다. 라오스 사람들은 대부분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짓는 것이 특징이다./사진=필자 전정숙

건기에는 비도 거의 오지 않는다더니 남떼로 가는 길에서는 내내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움푹움푹 패인 길에서 차는 제멋대로 트위스트를 췄고 창밖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바깥을 내다 봐도 시야가 흐리고 흔들려서 사진은 찍으나 마나였다. 라오스의 오지풍경을 카메라에 많이 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수도 비엔티안이나 번화가와는 달리 갈대를 이어 나무로 지었거나 허름한 집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추운데 저런 데서 어떻게 견디지? 이전에 와보셨던 장로님으로부터 “눈이 보고 싶어요. 한국에 한번 초대해 주세요.” 했다는 어느 라오스 청년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점에선 차라리 낭만에 가까웠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눈을 보지 못하고 사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답고 신비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맞은 추위와 처음 보는 눈은 그때 그들에게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이었다.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난데없이 불어 닥친 한파로 북쪽 지방에 내린 눈과 얼음 덮인 마을의 모습이 연신 나오고, 긴급회의에 소집된 군부 정권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낭만으로 즐길 수 있는 약간의 추위가 이 여름 나라 라오스에는 엄청난 재난일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가 간신히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전깃줄이 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늘어져 있어서 우리 버스처럼 큰 차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같이 갔던 현지 학생들이 내려서 누군가가 길가에 세워 둔 나뭇가지로 줄을 들어 올려 주어서 다행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나뭇가지는 아마도 늘어진 전깃줄을 들어 올리는 데 쓰라고 세워 둔 것 같았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전선을 팽팽히 당겨서 어딘가에 묶어서 고정해 두었다면 매번 저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안타까웠다.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남떼다!” 누군가의 말에 버스 안이 들썩거렸다. 다들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다봤다. 집집마다 동그랗고 큰 눈,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두 손을 모아 우리를 향해 “싸바이디, 싸바이디” 하며 인사를 해 주었다. 반가움에 들떠서 우리도 그들을 따라 “싸바이디” 하며 인사했다. 외지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반가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교인들이 사택 한쪽에서 김밥을 말고 있는 장면. 김밥 외에도 떡볶이, 잡채, 부침개, 김치, 라면을 요리해서 마을잔치를 벌였다./사진=필자 전정숙

차를 세우고 보니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비를 피해 처마 밑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그곳은 라오스 정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남떼교회의 깜펫 목사님 집 앞이었다. 우산도 없이 비 맞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버스를 따라 맨발로 뛰어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우와 우와” 연방 탄성을 지르며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는 그들에게 마구 손을 흔들어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이 저토록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다니….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도 컸을 테고, 좋은 마음으로 멀리까지 자기들을 찾아와 준 우리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으리라. 
 
남떼마을에서 요리하고 있는 교인들./사진=필자 전정숙

남떼마을은 국제 NGO로 집짓기 봉사활동도 하고 계신 샤론국제학교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이 2003년부터 많은 후원을 해 오고 있는 마을이었다. 두 분은 그 동안 이 마을에 소도 10마리나 사주고 수도시설도 마련해 주었으며, 몇몇 학생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고 등록금을 후원해 대학도 보내주면서 라오스의 미래를 위한 투자를 꾸준히 해 오고 있다고 한다. 그간 두 선생님을 통해 베풀어진 사랑 덕분인지 이 마을사람들에게는 유달리 한국 사람들에 대한 호감이 커 보였다. 
 
이산가족 상봉 저리 가랄 만큼 해맑은 미소에 담긴 그들의 기대와 환호에 우리 모두는 뭉클해졌다. 차에서 내려 사택으로 들어가면서 어르신들은 다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고 사올 걸 그랬다.’ 하시면서 너도나도 주머니에 있는 사탕이며 과자며 빵을 꺼내서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다가 이미 받은 아이에게 다시 차례가 가기도 했나 본데, 놀랍게도 한번 받은 아이들은 다시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도 먼저 받겠다거나 더 받겠다고 달려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순간, 너무나도 조용한 이 아이들의 착하고 수줍은 모습과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리를 좇는 그들의 시선을 우리는 피부로 느꼈다. 그때만큼은 모두들 스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그곳 목사님 사택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집 주위에는 우리를 구경하겠다고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떼마을 아이들, 우리를 보겠다고 사택 문앞까지 왔다./사진=필자 전정숙

우리는 점심으로 남떼교회 목사님 댁에서 찹쌀밥과 삶은 닭고기, 돼지고기, 나물요리를 대접받았다. 밥도 고기도 매콤한 소스에 찍어먹었는데, 뜻밖에도 입에 맞았다. 고기는 담백했고, 무엇보다도 손으로 꼭꼭 뭉쳐서 찍어먹었던 찹쌀밥은 고두밥 같기도 하고 누룽지 같기도 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드디어 잔치 준비에 돌입했다. 각자 잡채 팀, 김밥 팀, 떡볶이 팀으로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비도 오고 가스도 없어서 비좁은 실내에서 음식을 해야 했고, 물도 그릇도 도마도 부족해서 말이 잔치지 사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거기 사람들은 칼 하나로 나무도 자르고 음식도 썰고 해서 소도 잡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칼날이 무뎠다. 다행히 사찰권사님이 같이 와 계셔서 칼도 갈아주시고, 나무를 쪼개 땔감도 만들어 주셨다. 또 눈치 빠른 주민 한 분이 우리를 도와 불을 피우고 프라이팬 놓을 자리도 뚝딱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손짓발짓으로 구하면 같이 간 학생들이나 마을사람들은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고 원하는 것을 떡하니 찾아다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낯선 그곳의 열악한 남의 살림살이들을 가지고 우리 음식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남떼마을 아이 하나가 매운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다./사진=필자 전정숙

막막하기만 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 좁은 부엌 뒤편이나 화장실 옆 빈자리에서 장작을 지펴서 떡볶이를 만들고 부침개를 부치고 잡채거리를 볶았다. 사택 안쪽에서는 나이 많은 권사님 셋이서 귀여운 ‘못난이 인형’들처럼 쪼르르 앉아 쉬지 않고 김밥을 말았다. 여름나라 라오스에서 장작불 피워 한국음식을 만들다니! 사실 장작을 지핀 것은 휴대용 가스 사는 것을 잊어버려서이고, 그 때문에 가져온 가스버너도 무용지물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재미있던지. 장작을 패고 불을 지펴가며 연기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기대하고 지켜보는 눈동자들을 생각하면서 어서 해서 먹여야지 하는 마음에 우리는 열심히 말고 볶고 지지고 부치고 무쳤다. 그러고는 이상기온으로 날씨가 추운 것조차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아니겠느냐고, 그 덕분에 우리가 쪄 죽지는 않게 된 거라며 깔깔거리고 수다를 떨어가며 우리는 진심으로 그 순간, 행복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우리는 서로 눈만 마주치면 울면서 또 웃었다. 마냥 좋아서. 
 
그렇게 해서 다 된 음식을 뷔페식으로 차려놓고 보니 꽤나 그럴싸했다. 김밥 꽃도 이쁘게 피었고, 샤론학교에서 담은 김치도 맛있게 익었고, 빨그레한 떡볶이에는 군침이 절로 돌았다. ‘역시 선수들은 다르구나!’ 감탄하면서 나는 연로하신 권사님 장로님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에 뭉클했다. 그런데도 어르신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나이 많은 내가 따라와서 폐라도 끼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며 미안해 하셨고,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드려도 젊은 사람들이 수고해 줘서 미안하고 고맙다고 손을 잡아주시고 등도 두들겨 주셨다. 평소 직장을 핑계로 교회활동에 열심을 내지 못했던 내가 이 먼 곳에 와서야 이 어르신들의 푸근함과 너그러움과 정겨움을 느끼게 되다니. 그분들과 함께하면서 나는 이제까지 마냥 어색하고 무심하기만 했던 내 안의 벽 같은 것이 살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가 만든 매콤한 한국음식을 진짜 잘 먹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늘어선 줄은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2백 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들었는데도 그들은 차분하게 줄을 서서 공손히 음식을 받았다. 음식 만드는 것에서부터 자기들 손에 음식이 들려지기까지 그들은 내내 조용하고도 호기심 찬 눈으로 간간이 웃음을 지어보이며 우리를 지켜보면서 기다려 주었다. 우리가 ‘김밥’, ‘김치’, ‘잡채’ 하면서 음식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맛있게 드세요!" 하고 인사하면, 그들은 "컵 짜이!(고맙습니다)" 하면서 마주 인사를 해주었다. 
 
남떼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한 컷. 헤어지기 전 우리가 입었던 "I Love Laos"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벗어서 그들에게 입혀주었다./사진=필자 전정숙

설거지까지 다 하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식사를 다 끝내고 나니 거짓말처럼 수돗물이 끊어지는 시간이었다. (그 마을에서는 하루에 몇 차례 물이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명절에 시댁에 간 며느리에겐 우는 아이가 효도한다고, 딱 그 짝이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일회용 그릇들을 정리하고도 남아 있던 설거지거리를 수북이 쌓아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곳 분들은 다들 괜찮다고,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난 설거지라서 미안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 나눔으로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진정한 힐링이 되다 
 
라오스 사람들의 눈은 너무나 깊고 맑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들의 눈을 통해 나는 순수한 영혼의 느낌을 읽었다. 조용하고 수줍고 얌전하며 잘 웃어주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각박하고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들, 너무 많은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더 편한 것을 추구하는 우리들, 남들에게 잘 웃어주지도 않으면서 나 혼자 웃고 살겠다고 남들을 울리는 우리들, 그러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을. 하지만, 이곳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자본의 유입으로 중국인을 위한 신도시가 생기고, 날이 갈수록 개발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수도를 중심으로 물가도 땅값도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자본주의의 물결이 이곳 사람들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이미 변화의 소용돌이에 들어선 이곳, 라오스. 나는 아름다운 이곳 사람들의 미소를 가슴 한 편에 고이고이 담으며, 맑고 순수한 그들을 더 오래도록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라오스 주민들과 함께 김치 속을 넣고 있는 교인들. 어르신들은 빠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맛있는 김치를 뚝딱 만들어냈다.

이번 여행이 내게 몹시도 뜻 깊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라오스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지를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그들과 우리가 서로 처지와 형편은 다르지만 지구촌의 한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베풀고 나눔으로써 더욱 커지는 사랑의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봉사가 그렇겠지만 혹시라도 내 마음 안에 가난한 나라에 가서 못 사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고 왔다는 우쭐함이나 교만함이 자라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받으면서 솔직히 조금은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보람을 느끼는 것과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의 미묘한 간극을 구별하지 않으면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의 경우에는 준비하고 수고한 것 이상의 기쁨을 그들을 통해 얻어서 이번 여행이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감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긍휼의 마음은 아름답지만, 자칫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행복의 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 절대로 갑의 생각으로 을을 불쌍히 여기며 적선하는 그릇된 마음의 쏘삭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에게는, 자신만만하게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본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서 남들을 돌아보기는커녕 나 자신조차 놓아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이 회복시켜 주셨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깨달았다. 라오스에서 돌아온 지금, 나는 아침저녁으로 라오스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통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시기에 그곳 라오스를 가게 하셨을까? 지금의 나는 그것이 궁금하지만, 몇 년 후 아니 몇 십 년 후의 나는 그분이 예비하신 완벽한 계획과 뜻을 꼭 깨닫게 될 것임을 믿는다, 문득 어느 날. 
 
■ 기억나는 에피소드들 
 
현지 남떼교회 사역자 사택에서 마을잔치를 준비하기 전에 담임 김길진 목사(가운데 남자)와 성도들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사진=필진 전정숙 집사

하나, 
 
라오스에서는 얼마 전부터 여행자들은 반드시 한 명의 현지 가이드와 같이 다니도록 의무화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우리 팀과 함께 다녔던 가이드, 베는 영어는 물론 한국말도 전혀 할 줄 몰랐다는 거다. 그래서 현지 샤론국제학교 이사장님이 몸소 가이드 역할을 대신해 주셨다. 30대 초반의 아가씨인 그녀가 한 일이라곤 인원수를 점검하고 우리를 따라다니며 간간이 간식을 사먹고 현지인들과 수다를 떨고 이동 중에 잠깐잠깐 조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다들 그녀를 귀여워했는데, 우리가 그런 자기를 보며 웃으면 그녀는 졸다가도 깨서, 먹다가도 멈추고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그래도 눈치만은 백단이어서 표정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라오스 어로 대답하거나 찾는 것을 갖다 주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우리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주인 없는 짐이 우리 짐에 딸려 와서 한참 주인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자기 가방을 우리 차에 놔두고 집에 가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있던, 느릿느릿한 그 아가씨의 모습이 떠올리며, 라오스 정부에서는 어떻게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가이드를 붙여 줬을까 의아했는데, 한 명이라도 일자리를 갖게 해 주려는 라오스 정부의 정책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꽤 큰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헤어질 무렵에는 한국말도 많이 배워서 알아듣고 따라했는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누가 알겠는가. 혹시나 그녀가 능통한 한국말로 나를 맞이할지. 
 
 
둘, 
 
라오스에 갈 때 우리는 미리부터 I love Laos라는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준비해가서 입고 다녔다. 그러다가 남떼에서 마을잔치가 끝난 뒤 마을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나서 각자 티셔츠를 벗어 그곳 주민들에게 입혀 주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는 가지고 갔던 여름옷들을 챙겨서 이사장님 편에 보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옷을 오래 입었다고, 싫증이 나서, 유행이 지나서, 맘에 안 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또 새로 사곤 한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살지만, 과연 우리가 정말 부족한 것일까. 
 
 
셋, 
 
라오스의 화장실은 내가 애기 때나 썼던 말 그대로 ‘푸세식’이었다. 호텔 빼고는 휴게소 화장실에조차 물 받는 양동이와 바가지가 있어서 직접 물을 부어 내려야 한다. 발 하나 딱 올려놓을 만한 받침으로 되어 있는 변기는 올라가면 볼일을 잘 볼 수 있게 쪼그려 앉아진다. 다행히 옛날 우리네 화장실처럼 아래가 들여다보이지 않고, 깊은 구멍으로 되어 있지 않아 빠질 위험은 없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잘 못 올라갔는데, 생리작용 덕분에 다들 금세 적응했다.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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