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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상에 얽힌 명당 터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이종선기자 송고시간 2019-08-23 11:22

아시아뉴스통신 이종선 국장

한여름이 지나 조석으로 찬바람이 스며들고 추석명절이 다가오면 조상 묘 벌초가 시작된다.
지금은 화장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으나 과거 매장이 당연시 돼 왔을 때 화장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것으로 여겨 자식이 부모를 모실 장지를 마련 못하면 불효임을 자책하기도 했다.

풍수지리에 출세하거나 부자 되려면 어떤 묘를 쓰느냐에 따라 자손의 명운이 달라진다는 조상에 얽힌 명당 터에 관해 심층 취재한다.

왕권이나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조상의 묘를 어디에 모셔야 왕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자락의 남연군묘는 주변의 빼어난 풍광과 함께 좌청룡 우백호까지 뚜렷한 명당 터로 전해오고 있다.

세상에 길흉을 동반하지 않는 명당은 없다고 한다.
두 명의 왕을 배출하고는 조선이 멸망했다는 사실이 근간일 것이다.

1822년 흥선군은 부친 남연군(인평대군의 6세손)이 죽자 한 지관이 가야산 동쪽에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가 있으며, 홍성 오서산에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알려주자, 두 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의 천자지지를 선택했다.

천하 명당 터로 알려진 가야산의 2대 천자지지 터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시신을 모셔야 할 곳에는 5층 석탑이 서 있었다.
그러나 야심에 차 있던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부친묘소를 200km(500리) 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당시 운구할 때 사용됐던 상여는 남은들(덕산면 광천리 옛이름) 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의 보답으로 대원군이 하사한 궁중식 상여로 ‘남은들 상여’라 이름 지어 지금은 중요민속문화재 31호로 원형 그대로 상가리에 보존돼 있다.

1846년 대원군은 2명의 왕손을 본다는 명당인 1400년 된 고찰 가야사에 승려가 살지 못하게 하고, 불을 질러 폐절시킨 뒤 석탑 자리에 부친 묘를 이장했다.
그 후 둘째아들 재황이 고종임금으로 보위에 오르자 그 보은의 뜻으로 묘지 밑에 지금의 보덕사를 지었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 밀사를 파견한 사건에 연루돼 고종이 물러나고, 손자인 순종(1874~1926)이 황제로 등극하며 남연군묘는 2대 천자지지로 끝이 난다.

이처럼 흥선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를 모신 이곳은 과연 2대 천자지지의 명당인가? 아니면 조선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흉지인가?

오늘날에도 예산 땅은 산세와 수세가 좋아 대권을 꿈꾸는 여러 사람들이 조상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기도 한 특별한 곳이다.

지관, 용혈사수, 풍수지리, 수맥 등 명당과 관련된 용어들을 읊조리면 김일성 사망을 1년 전에 예고하고 전.현직 대통령 가족묘 터를 봐준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도사인 육관도사 손석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남의 묘 터를 봐주기 위해 지방 출장 중 심장마비로 1998년 72세로 작고하고 남연군묘가 내려다보이는 석문봉 기슭에 자신을 묻었다.

생전에 자신이 이곳에 묻혀야 할 이유를 ‘북두칠성의 기운을 한 몸에 받는 곳’, ‘꿩이 적을 피해 알을 품고 움 쿠리고 앉은 자세’의 명당임을 아들에게 밝혔으나 묘지는 비석도 석상도 없이 그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육관도사는 생전에 “나라의 앞날 운세는 매우 전도양양하다”며 하늘의 중앙으로 천제의 대궐이라는 자미원(紫微垣)이 바로 이 곳이라고 했다.
상서롭다는 뜻의 자(紫)를 쓴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이 그 좋은 예로 명당 ‘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 흔히 떠도는 말로 액운이 겹치면 조상 묘를 잘못 써서 그렇다고 단언하지만 이와 관련해 믿기지 않는 팩트가 있다.

분가해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3형제는 각자 집안에 우환이 겹치며 하는 일 마다 꼬이고 안 풀리자 상의 끝에 선친이 발길을 끊은 지 50여년 만에 조상 묘를 찾아 나섰다.
그 곳에 사는 가장 고령인 먼 종친(당시 92세)을 만나 선대 묘를 찾고는 아연실색, 3형제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6~9대조를 모신 묘소는 여기가 확실한데 6대조 봉분은 완전히 가라앉은 데다 정 중앙에 말뚝을 박아 빨래 줄을 널어놓았고, 9대조 묘는 아예 봉분을 밀어내고 일궈논 밭에는 보리 싹이 무성했다.

형제들은 무릎을 쳤다. “바로 이 때문이야!” 서둘러 이장하고 큰 돈 들여 비석과 조경으로 공원묘지처럼 정성을 다해 단장해 놓았다.
그 뒤 우환이 사라지고 하는 일 마다 술술 잘 풀린다고 하니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오비이락(烏飛梨落)을 떠올리게 한다.

더더구나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통령선거가 치러질 때면 지관, 역술가, 무속인들의 주가가 오르며 그들의 예언에 촉각이 모아진다.
대권주자들의 조상 묘 이장은 어제 오늘일은 아니지만 대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가 있다.

16대 대선 1개월을 앞두고 예산읍 산성리로 선친 묘를 이장한 당시 이회창 대표는 결국 3선도전도 실패로 끝난다.

패배의 원인을 터가 안 좋고, 과거 일제 강점기 때 무덤에 쇠말뚝 꽂으면 정기가 끊어진다는 일본인들의 자행에서 비롯된 이 대표의 선친 봉분에 꽂힌 식칼 5개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한동안 떠돌았다.

그러자 2004년 4월 종친들은 묘지이장을 거론하며 예산읍 산성리에 있던 선친 묘를 신양면 녹문리 야산으로 옮긴다. 이어 2007년 7월 다시 부모 묘 위쪽으로 조부와 증조.고조 등 선영 10기를 이장했다.

예전에 선친 묏자리를 잡아준 풍수지리 연구가 박민찬씨는 “1996년과 2002년 대선에 앞서 이장을 권유한 인연으로 이번에도 이장 지를 정해줬다”고 밝혔다.

2010년 다시 이 대표의 종친들이 녹문리 부모 합장묘만을 개장한 뒤 유골을 홍성 추모공원에서 화장하고, 개장지 인근에 수목장 형태로 모셨다. 4번째 이장인 셈이다.

여기에 이미 고 김종필 전 자민련총재가 2001년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 옮긴 시왕리와는 가까운 위치로 ‘제왕이 태어날 지세’이며, ‘선비가 앉아서 책을 보는 지세’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또 “김대중 전 대통령도 조상 묘를 옮긴 뒤 대통령이 됐다”고 밝힌바 있다.

현세에 조상과 나, 즉 명당 터로 인해 조상은 극락장생? 나는 부귀영화?

모 사찰 주지스님은 내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겼다.
“죽어서 천당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입니다!”
“살아서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천당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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