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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정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고은정기자 송고시간 2020-01-06 13:38

 산남창의지(하) 밀지관련 내용.(사진제공=독립기념관)

[아시아뉴스통신=고은정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정용기를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고 6일 밝혔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정용기는 지난 1862년 충절가문으로 알려진 영일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1887년 아버지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했다.

지난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해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를 내렸다.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지난 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는 영천창의소를 설치해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고, 권세가를 비롯한 각종 통문이나 격려문을 지어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같은 해 2월 정용기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됐고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정해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했다.

같은 해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다.

결국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고, 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됐다.

4개월이 지나서야 풀려난 정용기는 ‘일제가 만든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지난 1907년 봄 정용기는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했고 소규모 지역 의병부터 군인 출신까지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했다.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산남의진은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하여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정용기의 공훈을 기려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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