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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교회 정영구 목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8-11 01:11

하나교회 정영구 담임목사.(사진제공=하나교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말씀에서 바울은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듯이, 18절까지 이 서신서의 핵심 주제를 다시 정리하고 편지를 마무리한다. 그 주제가 십자가이고 예수의 흔적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믿음과 그 예수의 흔적의 몸으로 사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복음의 결정체라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믿음과 몸이다. 십자가는 그리스의 믿음,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신앙이다. 그 믿음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내 몸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역사가 예수의 흔적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진실성을 이것으로 피력한다. 사도는 말씀과 사명의 약속을 예수님께 직접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12제자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직접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안에서는 늘 바울의 사도의 진실성이 논란거리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의 진실성이 이 ‘예수의 흔적’에 있다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이 당당함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흔적이라고 하는 단어가 ‘낙인’ ‘치욕’ ‘오명’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훈장이나 면류관이라고 하는 자랑거리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부끄러운 상처를 의미한다. 고통이고 슬픔이고 아픔이다. 예수의 고통, 예수의 슬픔, 예수의 아픔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것으로 자신의 사도성, 믿음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의 죽음은 단번에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이 있고 모든 죄를 덮을 수 있을 만큼의 은혜의 바다이다. 다른 예수가 필요 없고, 또 다른 율법의 행위가 필요 없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현재적 증언이고 종말론적인 증인들이다. 십자가의 현재적 증언이라고 하다면, 2천년 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지금 이곳(Now and Here)’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그 믿음으로 ‘오늘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인 증인들의 현재적 고백의 삶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마귀의 삶이 거짓이고 예수의 삶이 진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맞다’라는 결정적인 증인의 편에 서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들이고 증인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자기의 증언을 충실히 하려면 곤궁과 박해와 환난을 견뎌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뜻은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고백하려는 증인들의 증거들을 채우는 과정을 말한다. 증인의 삶이고 증거들을 몸으로 새기는 과정이다.

갈라디아서 강해설교 2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 안에 있을지어다
갈라디아서 6장 17-18절, 이사야 53장 4-6절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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