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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영락교회 김치두 목사 '심령이 가난한자는 누구인가?'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8-15 18:45

호치민영락교회 담임 김치두 목사.(사진제공=호치민영락교회)

복음칼럼 - 심령이 가난한자는 누구인가?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첫 설교이다. 주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모두발언(기조연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설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12절 까지의 제목이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왜 천국을 소유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정리해 보려고한다. 본 해석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다소 이질감이 생기더라도 비판하기 보다 여지를 두고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지갑에 돈이 없으면 가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뱃속에 배설물이 비워져 없을 때는 가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귀한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을 때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심령의 가난함이란 심령에 있어야 할 귀한 것이 없는 상태라고 할수 있다. 그러면 심령에 있어야 할 귀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창조 때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죄로 통해 더러워져 거룩하신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 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이 심령에 없는 자이다. 영원히 저주아래 있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어떻게 심령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천국을 얻는다고 하는가? 하나님 없이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상호 동화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앞에 제시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정의가 바른 것이라면 이 선언을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없나니 안타깝게도 지옥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원히 저주아래 있어야 할 존재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의 그들의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임의로 심령이 가난한 자를 천국을 소유하여 복이 있는 자로 가공하기 시작했다. 심령의 가난함의 개념을 새로 정의했다. 하나님이 그 심령에 계시지 않음으로 영적 심각한 상태의 사람을 심령을 비운 겸손한 사람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렇게 바꾸었더니 복이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것이 99.9% 이상이 수용하고 믿고 있는 산상수훈의 전통적인 해석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좀 다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의 의미는 앞서 제시한 하나님이 그 영에 존재하지 않아 비참하고 저주 받은 자라는 개념에 이의가 없다. 뒷 부분의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 상호 동화가 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가능성이 0% 이지만 주께서 십자가를 지러오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죄사함은 은혜를 힘입어 다시 심령에 하나님을 모심이 가능해 졌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어 천국을 소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그 어떤 노력으로도 천국을 소유할 수 없었는데 예수께서 근본 문제인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오셨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도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주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대 변혁에 대한 선언이다. 다른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 사랑을 확증( 천국을 소유) 하신 것(고전5:8)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에 속한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기는 커녕 꿈꿀 수도 없는 저주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주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를 입힘어 거룩을 회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심령에 다시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우리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설교, 첫마디에 이 중요하고도 대단한 선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날 때 부터 심령이 가난함으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로 천국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하셨다. 하지만 전통의 해석은 천국을 얻기 위하여 심령이 가난해 짐( 마음을 비우고 낮추어 겸손해짐)을 요구하는 것이다. 소위 예수님의 메시지는 복음적이지만 전통의 해석은 율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되기를 힘쓸 필요가 없다. 소위 은혜를 더 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범하는 꼴이 된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라는 것은 말이된다. 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귀한 것은 심령이 가난하여 영원한 저주의 운명에서 특별한 은혜로 천국을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아울러 이 선언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수훈의 대전제 이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고수준의 윤리를 실행할 명분과 힘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이런 해석을 하게되는데 결정적인 힌트를 준 단어가 있었다. 개정성경에 누가복음 6장 21절 말씀의 "이제" 라는 단어였다. 개역개정에는 지금(now)으로 변경되었다. 산상수훈의 해석에 이전과 지금의 달라진 상황에 대한 메시지라는 인사이트를 얻게 한 단어였다. 그래서 지금 주님이 오심으로 이전과 다른 변혁이 있는데 그 내용의 타이틀이 심령이 가난하여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천국을 얻게 된다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은혜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천국을 소유하는 복된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고 천국을 만끽하는 삶 꾸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눅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롬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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