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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싸움의 기술'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10-09 03:38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싸움의 기술]

(고린도후서 10장)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는 사람일까?
언제나 '허허'하며 웃기만 하고
자기 주장이 없는, 그저 좋기만 사람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 좋기만 한 건 결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울 땐 싸워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언제 싸워야 하며,
누구와 싸워야 하며 어떻게 싸워야 할까?

1. 싸울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고후10:5)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때는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교만이 
신자의 모임인 교회에서 드러날 때다.

신자들의 모임에서는 하나님이 드러나야 하고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 교만한 자가 있으면
함께 자라가는 것에 방해가 된다. 

다른 것에는 참고 양보하고 손해봐줄 수 있을지 몰라도
교만하여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자까지 
용납하고 받아줄 수는 없다.

그에게 양보하고 그에게 져주다가는
교회가 무너지고 망가져 버릴 것이기에,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떠나게 될 것이기에
반드시 싸워야 하고,
교만을 쳐부수어야 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2. 불신자와 싸워야 할까?

현대 기독교는 싸워야 할 곳과
싸우지 말아야 할 곳을 뒤집었다.

성범죄 저지른 목사가 버젓이 설교하고 있고,
가짜 학위, 설교 표절, 논문 표절을 넘어
삶 자체가 거짓인 자를 대형교회 목사로 존재하고 있고,

대형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기 위해
교단법까지 대놓고 어기는 목사가 
교단 총회를 농락하고 있는데,

그들을 상대로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불신자인 교회 외부 세력과의 싸움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동성애, 이슬람 등과의 싸움이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교인들의 눈을 외부로 돌리게 해서
자신들의 사악하고 패역한 짓들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사들이 악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걸 
신자라면 간파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교회 외부의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악하고 교만한 자들이다.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은 
교회 외부의 이슬람이나 동성애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목사와 교인들의
도덕적 타락과 교만함이다.

동성애자들이나 이슬람 교도들 등의 불신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해 높아진 교회 내부의
타락하고 교만한 자들과 싸우는 것이
교회를 회복할 유일한 길이다.

3. 어떻게 싸워야 할까?

그렇다면 타락하고 교만한 자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 것일까?
두 가지의 중요한 싸움의 기술이 있다.

첫째, 권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내가 좀 지나치게 자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고후10:8)

주님이 사도에게 주신 정당한 권위를
사도 바울은 사용했다.
바울의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전혀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만하고 타락한 자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 때는
'정당한 권위'를 내세웠다.

사람들이 거짓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아무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 리더로서의 책임 회피다.

평소에 쓸데 없이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자신에게 잘해야 복 받는다는 헛소리를 한다면,
그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타락한 자다.

그러나 싸워서 지켜야 할 성도들이 있음에도
가짜와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물러나 버린다면
그건 참된 권위조차 내팽개치는 무책임함이다.

권위주의와 권위적 태도는 버려야 하지만,
참된 권위를 사용해서
올바른 싸움을 하는 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자랑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사도와 성도들의 기본적 태도다.

그러나 진리를 지키고 교회와 성도를 지키는
중요한 싸움의 상황이 된다면
자랑해야 한다.
자랑이 싸움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자랑해야 할까?
자랑은 분명한 한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른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고후10:13)

자랑은 정확한 한계를 지켜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자들이 하는
헛되고 교만한 자기 자랑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랑의 한계는 무엇일까?
자기의 수고를 자랑하고
주님 이름 들먹이며 마음껏 자기 자랑을 하면 될까?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10:15)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고후10:17)

다른 사람의 수고를 자기의 것인양 
자랑해선 안 되고,
주님을 벗어나 자랑해서도 안 된다.

바울의 자랑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이고,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향력의 확대는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직 복음의 확장, 
참된 구원을 받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민이
바울의 관심이었고,
그 사실을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4. 나는?

교회에서 일반신자로 오래 생활했다.
집사로 살았고 감리교회의 권사(안수집사)로 살았다.

그때 안타까운 일을 많이 보았다.
교인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교회에만 잘 다니면
좋은 신앙인인 듯 심각하게 착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교회생활에 중독되어
교회에 안 가면 불안한 금단 증상을 
보이는 교인들도 많았다.

일반신자로 살아가면서 
말씀묵상을 가르치기도 했고,
기회만 있으면 묵상 나눔 모임을 만들었고,
모임마다 묵상 나눔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나를 살리고 함께한 분들에게도
생명을 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신대원 공부하고 목사가 될 때 
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는 사역이나,
외국으로 나가 선교하는 것은 배제했다.

그건 나의 은사도 아니었고 
나의 능력 밖이었고
나의 주된 관심사고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 사람이 바르게 믿도록 돕는 것'에
나의 사역의 방향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이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훈련하는 것을
목사로서 내가 할 일로 정했다.

뒤늦게 목회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한 가지에만 집중해도
나의 사역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목사가 되고 보니,
말씀 하나에 삶을 거는 성도들을 세울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있음을 알았다.
그동안 목사들이 잘못 가르친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하는 싸움이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살기 위한 기복신앙, 
무속신앙과 비슷한 목사 중심주의 신앙,
목사의 범죄를 비판하지 못하는 맹신적 신앙,
성경의 해석은 목사에게만 맡기려는 사제주의 신앙 등
싸워야 할 오류가 너무 많았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타락한 교회들과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네가 뭔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을 비판하느냐?"
"교회를 비판하고도 네가 목사냐?"
등의 메시지와 댓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난 원래 성격이 평화주의자다.
어떤 싸움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극단적 평화주의자인 내가 
이런 싸움들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묵상글을 통해서지만,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계속한 이유가 있다.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려는 거창한 목표 따위가 아니다.
나는 그런 거대담론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모든 싸움의 목적은 
말씀에 삶을 거는 성도를 
한 사람이라도 더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마음은 목회를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의 목사됨을 주장하는 자를
참아내지 못한다. 
그런 자들을 보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고,
심하면 역겹기까지 하다.

나는 그런 태도를 가진 목사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권위적인 태도를 갖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조차 내팽개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는 않다.
목사의 정당한 권위는 어디서 나올까?

많은 목사들이 가지는
무게를 잡는 걸음걸이,
목소리를 깔고 천천히 말하는 말투,
상대를 억누르려는 대화법 등은
바리새인을 닮은 위선자라는 걸 나타낼 뿐
결코 참된 권위가 아니다.

나는 목사로서 무슨 권위를 가지려 할까?
오직 한 가지, '말씀'에만 권위를 둔다.
내가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내가 말씀에 삶을 걸 때
참된 권위가 자연스레 나타날 것이다.
이것 외에는 어떤 권위도 내겐 없다.

나의 자랑은 무엇일까?
매일 묵상글을 sns에 올렸더니,
처음엔 내 글을 좋아했다가 나중엔
"결국 다른 교회 비판하고 목사님 교회 자랑하는 것이잖아요?"
라고 말하며 나를 떠난 제자도 있었다.

잠시 낙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스스로 가져보았다.
나의 묵상글이 헛된 자랑이 된 것이라면
나는 당장 멈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헛된 자랑이 아니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자랑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어서 매일 묵상하는 것이고,
묵상을 나누는 것이 묵상의 생명 유지에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sns에 나눈 것뿐이지만
누군가의 눈에 자랑으로 보인다면,
내가 자랑할 의도가 없었으니
그건 올바른 자랑이겠다 싶었다.

올바른 권위와 올바른 자랑이
싸움의 기술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나에게 깊은 위로를 주는 아침이다.

앞으로도 권위적이거나 권위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삶을 걸고 살아가는 참된 권위를 가진 자로,
헛된 자랑이 아니라 말씀만을 자랑하는 
참된 자랑의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길,
그래서 참된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올바른 신자의 삶을 잘 살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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