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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순창의 샘(우물) 이야기_(54) 금과면 고례리 웃샘

[전북=아시아뉴스통신] 이두현기자 송고시간 2020-12-12 07:22

샘물을 길어 조왕신에게 바치려고 새벽 첫 닭이 울면 웃샘은 언제나 만원이고 야단법석
산고(産苦) 든 집이 최우선으로 물을 길어 미역국 끓여 산모에게 먹도록 해야 젖이 많이 난다는 설 있어
애사 있을 시 샘물을 품고 대청소한 후 부정을 막기 위한 액막이 행위로 주문 외워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 웃샘, 사각, 깊이 1.5m./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의 기두봉, 덕진봉(德津峰, 384m)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리다 다시 아름답게 솟아오른 산이 보륵산(300m)이다. 이 산 아래 크게 개장하여 동남쪽을 향하고 마을이 형성되니 고례리이다. 이 마을은 원래 예촌(禮村)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정과 병합하여 고례리(古澧里)로 개칭되었다. 마을지형에 대해서는 서쪽샘을 소개할 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보륵산의 동북쪽은 동남으로 박환하여 마을을 휘감고 내려와 청용등이면서 안산을 이루고 범덕굴로 내려온 백호등은 들 가운데까지 내려오니 그 안에 전형적인 취락지가 형성되었다. 고례마을은 백제시대에 오(吳) 씨가 처음 정착해 살았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현재 고례리의 북쪽에 정골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새 터로 내려와 오(吳)ㆍ설(薛)ㆍ양(楊) 씨가 살았다고 한다.
 
고례 마을 앞에는 250여 년 된 소나무가 마을 숲을 이루며 잘 가꾸어져 있는데 이 소나무 숲을 ‘정문동’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설휘 라는 사람이 부인 옥천 조씨와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설휘는 학문에 출중하여 과거 시험에 1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남편을 잃은 부인도 슬픔을 참지 못하고 남편 뒤를 따랐다.
 
이에 당시 순창 유림들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부부사랑 이야기를 조정에 상소를 올리자 마을 앞 부지와 함께 정려가 내려와 이곳에 정려문을 짓고 소나무 숲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고례마을 숲이다.
 
아담하게 자리 잡은 고례리에는 샘이 세 개가 있었다. 그 중 웃샘은 마을 형성기로부터 옹달샘으로 각광을 받았다. 점차 마을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샘을 돌로 쌓아서 물의 양을 많이 담았다. 마을 주민들은 웃샘을 신성시 여기며 샘을 관리하곤 하면서 샘에 대한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주민 모두가 샘물을 길어다가 조왕신에게 바치려고 새벽 첫 닭이 울면 샘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서로 물을 먼저 뜨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다가도 새댁들이 아기를 낳게 되면 그 집이 최우선으로 일찍 물을 길어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도록 해야 젖이 많이 난다는 설이 있어서 최우선은 산고(産苦)가 든 집이고 다음은 조왕신에게 바치는 순서로 물을 길었다.
 
이처럼 웃샘 물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마을에 애사가 있을 시는 애사가 끝난 후 꼭 우물을 품고 대청소를 했다. 그런 다음에 부정을 막는다는 액막이 행위로 물을 떠서 동서남북에 부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이 물 먹고 떠도는 악귀 싹 물러가 우리 동네 부귀영화 누리고 편안하게 하옵소서” 하고 사정없이 물을 퍼 던진다.
 
요즘은 시대의 변천으로 마을마다 당산제를 지내지 않지만 우물과 당산나무를 중요시 여긴 마을은 매년 정월 보름 안날 샘 고사와 당산제를 올렸다. 고례리에서도 해마다 어김없이 당산제와 우물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요즘은 마을에 젊은이가 적어 옛 풍속을 잊혀져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우물을 잘 보존하여 소방용수로도 활용하는 관리가 필요하다.(출처. 순창문화원)

dhlee3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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