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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누가복음 1:57-80)
1. 돌잡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돌이 되면 돌잡이를 한다.
돌잡이는 아이의 첫 생일인 돌상에 여러가지 물건을 놓고
무엇을 잡는지에 따라 아이의 장래를 점쳐보는 풍속이다.
상 위에 있는 여러 물건 중에서 두 번 선택을 하게 해서
아이의 성격, 재능, 수명, 재물 운, 직업 등을 추정해보는 것이다.
이런 풍속은 왜 생겼을까?
이성과 과학이 득세하고 있는 현대에까지
이 풍속이 지속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할 것이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궁금하고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잡이 행사에
재물 운이 있는 아이, 학자로 성공할 아이,
경찰이 될 아이, 가수, 요리사, 공무원, 판사, 스포츠 선수 등
수많은 의미를 담지만 정작 참된 의미에서
아이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가지는 경우는 적다.
2. 침례 요한의 돌잡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
이웃 사람들과 친척들이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려 했다.
엘리사벳이 친척이나 가족 중에 전혀 없는 이름인
'요한'이라고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가랴에게 물으니 사가랴도 '요한'이라고 지어야 한다고
서판에 썼는데, 그 때 사가랴의 입이 풀려 말을 하게 되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눅 1:66, 새번역)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이 아기가 대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그 아기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이 그들에게 생겼다.
침례 요한의 돌잡이는 아버지의 혀가 풀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서판에 쓰자 사가랴의 혀가 풀린 것을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그 아기와 함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했다.
가장 참된 의미에서 아이에 대해 기대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아이와 함께 하시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고 기대한다면
돌잡이를 하면서 점을 치기보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아이와 함께 하기를
기대하며 소망하는 것이 지혜롭다.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은 주님의 도우심만큼
복을 받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함께 하도록 할 수 있을까?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돌잡이 대신 무엇을 했을까?
3. 부모의 역할
이성과 지각이 없는 아이에게 돌잡이는 시켜서
아이의 미래를 점치려 하기보다,
분명히 해야 할 부모의 역할이 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그 역할을 배운다.
먼저 엘리사벳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나이를 먹어 늙었고 불가능한 상태에서 아이를 임신했고
때가 되어 그 아이를 낳았을 뿐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요한이 '주님의 돌보심을 받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가지 측면이다.
(눅 1:6, 새번역)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눅 1:25, 새번역)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고
주의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지켰다.
그리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셔서' 임을 고백했다.
엘리사벳이 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녀의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사가랴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엘리사벳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고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지켰다.
그런데 벙어리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다시 입이 풀려 말을 하게 되었다.
사가랴가 입이 풀려 한 말이 중요하다.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성령에 충만하여 한 예언이었다.
(눅 1:67, 68, 새번역) [67]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벙어리에서 입이 풀리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에서 아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언했을까?
(눅 1:76, 77, 새번역)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에 대해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라고 말하며 궁금해 하였지만,
아이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침례 요한에 대해서
세상적인 욕심을 전혀 가지지 않았고
그저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되길,
그리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길 소망했다.
돌잡이를 통해서 아이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아이가 되길
점치고 바라는 짓을 하지 않았고,
그저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주의 보살피는 손길을 누려가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부모가 소망했던 것이다.
4.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부모가 세상적인 욕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소망하며 아이를 키웠을 때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눅 1:80, 새번역) 아기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제사장 집안의 소중한 아이,
사람들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기대했던 아이가
광야에서 살았다니 다소 충격적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왜 아이를 광야에서 살게 했을지 궁금하다.
아이는 자라서 '심령이 굳세어졌다.'라는 사실이
광야에서 자란 것보다 우선이다.
심령이 굳세어지고 광야에서 살았다는 말이
침례 요한의 성장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과보호를 받거나 유약하게 자란 것이 아니다.
부모의 지나친 간섭을 받으며 자란 것도 아닌 것 같다.
'심령이 굳세어지고, 광야에서 살았다'는 표현과
연결되어 생각되는 표현이 있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이 그 아이와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을 누려가도록 하려면
부모가 지나치게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는 울타리가 되어주고
그저 사랑과 배려를 해주기만 하고
아이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심령이 유약해지거나 짜증스럽도록 만들지 않고
심령이 굳세어지도록 키운다는 것은,
아이가 부모의 보살피는 손길보다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광야의 삶을 허락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5. 나는?
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진 것 없이, 그리고 특별한 기술도 없이
방위를 받고 있을 때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서 공동체 생활을 했고,
공동체를 나왔을 때는 돈 한푼 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진 것 같았다.
무섭고 두려웠으나,
아무도 나와 나의 가정을 도와주는 이 없었다.
처음으로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봉으로 가족을 건사할 수가 없었다.
생활 정보지 배포하는 일을 병행했다.
스틱 차량인 작은 중고 승합자를 운전해서
부산 전역을 밤새 돌아다니면서 정보지를 배포했는데
때려 죽여도 더는 못하겠다 싶으면 아직 1시간이 더 남았었다.
클러치를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운전이 힘들 정도로 계속하고서
아침 7시쯤이 되면 겨우 일을 마쳤다.
집으로 들어가서 아이를 안고 잠시 놀다가
잠에 골아 떨어져 있다가
오후 1시쯤 일어나 밥을 먹고 학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간 동안
내가 처절하게 깨달았던 사실이 있다.
나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버거워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주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의 삶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의 도우심을 누려가는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현실은 내가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죽도록 일을 했다.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다 삶이 너무 버거워서
퇴근 길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들을 지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감사하게도 우여곡절 끝에 말씀을 붙들었다.
말씀을 생명으로 붙들면서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내 힘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말씀이 주는 도전을 현실에서 실천해 가는 삶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누려갈 조건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실천이 결코 쉽지 않았다.
살아오던 방식이 관성처럼 내 삶을 끌고 갔다.
내가 몸이 부서져라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도
그 관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말씀이 나에게 주는 도전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말씀을 나누고 말씀의 가치를 전하면 살아갈 기회를
완전히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게 일하면서 살던 삶에 쉼표 하나를 찍고
부산의 삶을 정리하고 경기도로 이사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부터는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삶이 되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선택의 결과 나는 지금의 행복을 누려가고 있다.
그때보다 재정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말씀 하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하며
생명의 나눔을 누려가고 있다.
말씀묵상 세미나를 하고 말씀묵상 나눔 모임을 하면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분들이
실제로 내면과 삶의 변화를 누려가는 것을 본다.
세상에서 누렸던 어떤 기쁨도 이 기쁨과 비교될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삶으로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
내 삶을 이렇게 행복하게 이끌었다고 생각된다.
아들들에 대해서 염려가 될 때가 있지만
그들의 인생을 주님께 맡긴다.
그 아이들이 주의 인도하심 안에서
심령이 굳세어지길, 거친 세상이 광야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길 기도하며
아들들의 삶을 주님께 맡긴다.
아들들도 나와 아내도, 그리고 성도들도
주님의 보살피는 손길을 누려가는 삶이 되길,
주의 인도하심을 누려가는 삶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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