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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길위의교회 김선주 목사, '겨울 우화-영원한 시간 속으로'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1-16 01:08

대전 길위의교회 김선주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겨울 우화-영원한 시간 속으로 >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 자고 나면 아침마다 팔뚝만 하게 자라는 처마의 고드름처럼 시간은 매일 새롭게 자랐다. 내일 아침엔 내일의 고드름이 자라서 우리의 아침을 맞아 주었다. 시간의 고드름을 뚝뚝 분질러 우드득우드득 깨물어 먹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내일에 대한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됐다.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따위의 걱정은 아버지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내일의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것이 우리 생애 최고의 무기였고  아름다움이었다.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 말이다.

TV 따위는 없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따위도 없었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매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간에 맞추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산사(山寺)에서 울리는 범종처럼 동그란 파장을 그리며 마음 깊이 번져나갈 뿐이었다. 그 파장이 끝나고 나면 다른 시간의 파장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 시간의 파동을 타고 노는 데 천재적인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추운 날에도 온 세상을 다 덮어 버릴 것처럼 눈송이가 쏟아지는 벌판을 우린 달렸다. 아마도 우리의 몸 안에는 사냥꾼이나 전사(戰士)의 유전자가 탑재돼 있던 게 분명하다. 들과 산으로 몸을 날려야 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우리는. 방구석에 깊이 박혀 손가락으로 휴대폰이나 틱톡거리는 일로 영혼을 묶어둘 수 없었다. 우리의 유전자는 문명보다 강하고 위대했다.

겨울이면 약속이나 한 듯이 논바닥과 냇물은 얼어붙었다. 그 빙판 위를 시간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일이 전사(戰士)의 유업인 양 우리는 모든 것을 걸었다. 말을 달리는 인디언처럼 우리는 환호하며 빙판 위를 달려, 알 수 없는 시간의 지평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문명사회의 불안한 시간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과 신비감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존재를 불안에 떨게 하거나 미련하게 만들지 않았다. 알 수 없음은 불안의 요소가 아니라 신비감으로 충만한 시간의 심연에서 오는 예술적 영감이었다.

우리가 알아서 밥을 먹으러 집으로 기어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밥을 왜 안 먹느냐고 탓하지 않았다. 왜 공부하지 않느냐고 나무라지 않았다. 밥 따위를 먹고 안 먹고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다. 공부 따위가 우리의 영혼을 구속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밥 먹으라고, 공부하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엄마나 누이를 둔 아이들은 소심하고 쪼잔하기 그지없는 녀석으로 평가됐다. 시간에 맞추어 밥을 먹고 집에 가서 공부해야 된다는 강박을 가진 녀석들은 전사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들은 시간의 노예였다. 우리는 모두 시간 앞에 한없이 자유롭고 대범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비탈에 비료 포대를 깔고 바람처럼 내리달렸다. 우리는 미치도록 날렵한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속도였다. 그 속도를 맛본다는 건 아이가 자라서 쉽게 늙어버리는 것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 속도를 통해 산다는 것, 늙는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의 시간성을 직관할 수 있었다. 

비료 포대가 삐뚤어지거나 뒤집어져서 어딘가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일어나도 그건 불행한 일이 아니라 즐거움을 더하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해프닝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한 유비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자유와 풍요로 가득한 시간 속을 유영해 본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불행한 일을 만나도 그것을 해프닝으로 여기고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시간은 맑은 물로 충만한 풀장처럼 마음 놓고 헤엄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였다. 우리는 시간에 쫓겨 살지 않아도 됐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었다. 아무도 우리 시간의 풀장을 침범하지 않았다. 우리 시간의 풀장에 독극물을 풀거나 뱀을 풀어놓지 않았다. 겨울방학은 우리를 얽매고 있던 학교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헤엄치는 우주였다. 

천국의 시간을 ‘영원(Eternity)’이라 한다면 그 천국에는 한량없는 시간이 출렁이고 있다는 것일 테다. 그 시간을 마음껏 퍼서 쓰더라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천국의 시간이라면 천국의 다른 이름은 ‘영원’이리라. 그러면 그 시간 속을 유영한 우리의 유년은 천국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잠시나마 천국을 살아본 것이 내 생애에 얼마나 큰 위안이고 축복인지 이제야 돌아본다. 내가 돌아갈 천국이 있다면 아마도 그 시간의 풍성함 속에 내일의 걱정 없이 뛰놀던 때이리라.

예수가 거닐었던 갈릴리는 천국의 시간으로 충만했다. 엄격한 제사의식도 없고 절차나 형식에 얽매이는 율법적인 삶도 없었다.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일로 사람들과 뒹구는 것,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유목민처럼 목적 없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유랑하며 삶을 즐기는 것, 그 시간의 자유로움과 풍성함, 이것이 예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장 34절)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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