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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호동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무조건 순종이 옳을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4-17 05:00

말씀의빛교회 운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무조건 순종'이 옳을까?]
(출애굽기 6:14-7:7)

1. 

기독교 신앙의 개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순종'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도대체 '순종'은 누구에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문제다. 

'순종'은 해야 하는데 '순종'을 아는 것이 쉽지 않아서 
교회 안에서는 수많은 부작용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 부작용은 여전한 것 같다. 

대표적인 부작용이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리더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 말은 옳은 말일까?
분명히 틀렸다.
만약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면 
목사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된다.
하나님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건 '무조건 순종'은 틀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모세와 아론 이야기를 통해서 
순종은 누구에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다. 

2. 

뜬금없이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등장한다.

(출 6:14, 새번역) 모세와 아론의 조상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인데, 이들이 르우벤 가문이다.

왜 갑자기 족보를 등장시킨 것일까?
출애굽기를 읽는 1차 독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와 아론이 리더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알려주고 보여주고 증명하기 위해서다.

지금 시대와 달리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어떤 가문 출신인지와 누구의 자손인지가 
리더의 자격으로 매우 중요했기때문에 
리더와 대언자역할을 하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리더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삶을 이끌 리더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잘 살펴야 함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
'무조건 순종'이라는 말을 따르다가는
신앙도 망치고 인생도 망치기 딱 좋은 시대다.

이 시대는 기독교 신자의 숫자에 비해 목사가 너무 많다.
일단 정규 신학교도 너무 많은 편이다.
게다가 무인가 신학교도 많고, 
심지어 비정상적인 커리큘럼과 
비정상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비정상적인 자격을 가진 자들이 교육해서 
단기간에 목사 자격을 취득하게 하는 곳도 많다. 

목사를 해도 될만한 신앙과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이
정말 이렇게나 많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목사도 이렇게나 많고 
신학교도 많고 무인가 신학교도 많은 이 현상은
분명 이상하고 타락한 현상이 분명하다.

목사가 될만한 신앙과 인격과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검증 시스템이 없으니
하고 싶으면 다 하는 것이 목사가 되었다.

즉, '목사'나 '선교사' 타이틀을 갖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믿었다가는,
게다가 '무조건 순종'했다가는
큰일 나는 시대가 된 것이 분명하다.

4. 

어떤 목사라도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목사는 검증해 봐야 한다.
교회의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세우고 따른다면 
그것보다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검증해보아야 할까?
지금 시대에도 목사의 가문을 보아야 할까?
그가 유명 목사의 아들이니 괜찮은 목사라고 믿으면 될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보다 어리석은 판단은 없다.

우선은 그가 정상적인 신학교를 나왔는지,
그는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그의 사상은 어떤지,
그의 신앙의 컬러는 어떤지 등을 검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상적인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다 올바른 목사일까?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정상적인 교단 소속의 목사들 중에서 
재정비리를 저지르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학력을 위조하고 거짓말하는 목사도 많은 시대이니,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검증하고 끝낼 수가 없다.

더 중요한 검증을 해야 한다. 
그의 삶이 어떤지,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덕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지 
그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재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등은 
반드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5. 

모세의 모습에서 여러 번 강조하듯 드러나는
제법 의아한 부분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 6:29, 새번역)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주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이집트의 임금 바로에게 전하여라"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이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출 6:30, 새번역) 그러나 모세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바로가 어찌 저의 말을 듣겠습니까?"

'무조건 순종'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다.
거절하고 빼고 거부하는 태도인 듯 보일 정도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이 놀랍다.

타락한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 '무조건 순종'이 옳다면
하나님이 모세를 혼을 내시고 
왜 토를 다냐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모세의 항변을 귀담아 들으시고 
대언자 아론을 세워주셨다.

(출 7:2, 새번역) 너는,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을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여 주고, 아론은 그것을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여라.

뿐만 아니었다.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나서야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낼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무조건 순종'을 강요하시는 신이 아니다. 
당연히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는 건
이단이나 하는 패역한 짓이다.

6. 

이런 과정을 다 겪고 나서 모세는 어떻게 했을까?

(출 7:6, 새번역)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

'순종'했다.
그런데 이 '순종'은 '무조건 순종'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하나님이 그에 대해 해결책을 주시고 
다시 모세가 항변하고 
하나님은 대답을 해주셨다.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밀어부치고 
사람을 몰아쳐서 시키는대로 하게 하지 않으셨고 
차근차근 모세를 설득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이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과 '소통'하신다는 점이다.

소통과 설득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물론, 이렇게 하셨음에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은 심판이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통과 설득의 긴 과정을
하나님은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

올바른 목사라면,
올바른 신자라면 두 가지의 소통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과정을 
반드시 가져야 하고,
그 다음은 사람과도 소통해야 한다.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기회를 
서로에게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7.  나는?

젊은 날에 신앙 생활하면서 큰 고민이 있었다.
'순종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고민이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말에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가 
너무 큰 의문이었고 딜레마였다.

그래서 나의 신앙의 여정은 
누구에게 순종하는지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지금 시대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고,
실제로 듣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교회에서 선배에게 들었다.

그 선배의 인도로 기도 모임에 참여했다.
그 모임의 리더이셨던 권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그 음성뿐 아니라
그 분의 삶과 인격에서 믿을 만한 분이라고 판단되었다.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은사를 받기 시작했고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삶과 인격이 전혀 뒤따르지 않았다.
누가 크냐로 서로 싸우기 일쑤였고 
작은 문제로 삐지고 토라지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다투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이상하게 되었다.
교만해져서 자기 중심적이 되더니
결국 욕심과 탐욕과 정욕으로 넘어졌다.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음성에 무조건 순종하면 된다는 생각이 
순진함을 넘어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분명히 깨닫고 알게 된 시간이었다.

교회에서 '순종'의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대답이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일 것이다.
나도 그 경험을 했다.

목사 한 사람을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리더에게 무조건 순종'을 주장했다.
공동생활을 하는 집을 지었는데
시골에 있는 집이라서 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목사가 어떤 일을 시켰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내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랬더니 목사나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왜 토를 다냐고,
왜 목사 말에 순종하지 않냐고,
신앙의 기본이 '무조건 순종'이라면서,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신앙생활을 하냐고 야단쳤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맹신을 하라는 말인데 
그건 용납이 되지 않았다.

분명 목사가 잘못 판단할 수 있음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는데
'무조건 순종'이라니, 
그건 신앙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들이 제법 반복되면서 
결국 그 공동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공동체는 많은 문제를 안고 와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사는 여전히 어디에선가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답답하고 답답했다.
그럼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이제 방법이 없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거는 것 외에 
내가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순종'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은 것 같다. 

왜 나는 말씀을 치열하게 묵상할까?
말씀을 많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고,
말씀을 '몇 독'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말씀을 치열하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은근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서'이다.

'순종'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말씀을 매일 묵상하면서 
다른 누구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만난다.

말씀 속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부드럽게 촉구하시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을 만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점점 조금씩 
순종의 삶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해왔다.

나는 목회하는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
나와 같은 성도를 세우는 것이다.
목사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는
전혀 세우고 싶지 않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내가 얼마나 허물과 실수가 많은지 아는데
나에게 무조건 순종이라니, 그건 정말 끔찍하다.

내가 세우고 싶은 '나와 같은 성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에 삶을 거는 성도'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설득을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신자로 세워가는 것이 
내가 목회하는 가장 중요한 방향이다.

나도, 성도들도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에만 삶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에만 온전히 순종하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날마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나와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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