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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 '내어 쫒으라'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4-20 05:00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내어 쫓으라
(갈4:21-31) 

한 번쯤은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정말 바르고 선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늘 은혜 받은대로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그러질 못합니다.”
“내 인생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나는 누구일까요?”

그래서 이런 유행가도 있나봅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아브라함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유대 문화에 의하면 아들이 없다는 것은 집안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상속이 끊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문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한 번도 아브라함이 먼저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86세가 되던 날 까지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절박한 심정에 처한 이들 부부는 스스로 지혜를 발휘합니다.
사라의 종이었던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얻자는 논의를 한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나온 자식은 아니더라도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면 대를 이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덩달아 하나님의 약속도 지켜지니 그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히 ‘일석이조’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은 지혜를 모아서 아들을 얻는다면 집안의 대도 이을 수 있고 신앙도 지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계획대로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 입니다.

자신들 계획대로 집안의 대도 이어가고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룰 수 있기에 너무나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여겼는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때에 그리고 사라가 99세가 되던 때에 사라가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도저히 세상의 의학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죽은 태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케 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손으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분 그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과 약속을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어 나가려고 합니다.

기다리지 못합니다. 
기다리는 그 시간이 힘들고 어렵구 때로는 지칩니다.
그러기에 기다리가 지쳐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기다리가가 낙심하기도 합니다.
점점 조급해집니다.

결국은 기다려왔던 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조급한 마음에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끼워 맞추고 그것을 믿음인 것 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은 후에 그것이 하나님과 약속의 성취라고 믿고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그 순간에 기다리지 못했다고 벌주시거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다렸던 그 시간들을 생각하시고 또 그 자체로 인도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버리지 않고 그 자체로 인도해 가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두려움이라는 것에 굴복하고 조급함이라는 것과 타협해서 갖게 된 불신앙과 죄악의 뿌리는 뽑아 버려야 합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줄 알고 그려러니 하며 여지껏 거기에 익숙하게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것과 친숙하게 되고 오히려 나와 더 가깝게 느껴지고 편안하게 생각하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거 뽑아 버리고 그거 버리려니 왜 안 아깝겠습니까? 
왜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픕니다. 참 괴롭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차라리 신앙을 포기할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망의 마음까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괴롭고 아프다 할지라도 우리가 버려야 할 그 것.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내 스스로 조급함과 생각으로 얻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없고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과 관계 지으려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만들려 했으며 하나님이 기뻐 하실거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 뿐입니다.

마치 불신앙인 줄 알면서도 거기에 오래 젖어있다보니 그것을 신앙으로 만들려하고 신앙화시켜 살아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30)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어 쫓으라”

기다리지 못하고 내 판단으로 말미암아 갖게 된 불신앙 그것을 결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함께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혜와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늦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늦으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 판단대로 이스마엘도 얻었고 또 차 후 에 이삭도 얻었으니까 둘 다 약속의 성취로 여기고 겹겹상가 났다고 보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약속이 늦어진 것입니까?

우리는 이 생각부터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 듣고 계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시 딴 생각하셔서 못 들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제발 딴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기도에 집중 좀 해달라고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도 조급하고 두려운 것입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과연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실까?’

이미 우리는 믿음이 이긴다는 사실, 믿음으로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알지라도 우리에게는 그 과정을 인내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흔들립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조금 더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 약속 위에 말씀 위에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슬며시 얹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여기고 신앙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다림의 조급함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늦장 부리셔서 그렇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 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즈음에 먼저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갈이 사라를 무시합니다.    
집안에 깊은 불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이스마엘도 하갈을 통해 얻긴 했지만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괴롭습니다. 
아브라함의 근심과 고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4:29)

성경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모두 깨지고 인간의 방법이 모두 막혀서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고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30)

아주 매정하다 할 정도로 말씀하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픔을 감내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너무 매정하신 것 아닌가?

소위 하갈과 이스마엘을 향한, 동정론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찾아보게 되면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해매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깊이 위로하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 21:17‭-‬18)

하나님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받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 약속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를 두고 고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언급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4:28)

‘형제들아’ 라는 단어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희는’ 을 ‘너는’ 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말씀에 대한 묵상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할 때 아브라함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가 실수하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연히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은 과감하게 해결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미련을 두고 소위 인간이 말하는 인간애를 주장하면서 그거 붙들고 있다가는 결국 거기에 묻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가진 사랑과 가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말하는 인정과 인본주의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보다 더 뜨겁겠습니까?

우선 여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왜 안 아프겠습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왜 충격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하나님께서 하실 소리인가?” 왜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쫓겨 나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왜 찢어질 듯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약속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살아 온  것을 이제는 약속과 말씀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비신앙적인 것, 약속에 위배 된 모든 것을 떼어내려 하는 데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게 오랫동안 습관화되고 내 삶에 젖어 있었으니
그거 떼어내고 그거 쫓아내려니 아픈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동안 그게 신앙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손목이 찢어지고 발목이 찢어지고 머리가 찢어지고 옆구리가 날카로운 창에 뚫려서 피 한 방울 남지 않고 다 흘려 죽어가더라도 그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어 쫓으라’ 는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며 하나님을 매정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인본주의라는 이상에 사로잡혀서 인본주의와 사람의 정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위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자들이었지만 인간의 실수까지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관심은 바로 약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약속입니다.
또 그 약속에 속한 사람 곧  당신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무수한 약속을 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주신 약속 그 약속의 성취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두려움과 조급함 속에서 자신의 지혜와 판단을 가지고
그 정도면 약속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행여 그러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내어 쫓아야 할 것은 쫓아내야 합니다.

행여 그거 버리는데 아까움이 있더라도 내어 쫓는데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버리고 내어 쫓아야 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4:2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구약시대의 삶을 살펴보면 철저히 율법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위를 율법에 의해 판단 받고 평가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지키지도 못할 것을 율법화 시켜서 그 율법을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다 죽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아래서 해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시 그들의 삶이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율법에 매여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런 상태는 아닙니까?

그래서 어느 날은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이 되어서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아파해야 하고 또 어느 날은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신나게 돌맹이 던지며 정의를 외치고...

그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또 다시 스스로를 자책하며 ‘왜 나는 이럴까?’  스스로의 마음과 영혼을 위축시키고...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히4:28-30)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가장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약속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향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 우리 같은 존재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것을 어렵다고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위축시킬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가능하고 따를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상황이 아니라 당신 자체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또한 당신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찾겠다고 하시는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 
내 의지와 내 고집으로 형성된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버리고 내어 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래된 습관이든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 스스로에게 인이 박힌 고집이라든지 때로는 스스로를 믿음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불신앙과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던 교만들 까지...

그래서 오늘 성령을 따라 난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육체를 따라 난 모든 것을 철저히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에 아주 직접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화일수도 있습니다.
생각이나 성격일수도 있고 사고방식일수도 있습니다. 
오래 된 관습과 습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무형적인 것이 아닌 유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성령을 따라 난 당신을, 
약속의 자녀인 당신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모든 것, 그 모든 육체를 따라 난 것을 육체의 정욕으로 여기고 과감히 내어 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어 쫓고 다시는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녀로서 약속하신 유업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질문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 질문에 담대히 선포 하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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