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14일 일요일
뉴스홈
경주재래시장, 설 대목장 '풍경'

[=아시아뉴스통신] 은윤수기자 송고시간 2012-01-18 15:49

서민들의 애환 깃든 곳…여론형성의 공간 역할도

 경북 경주시 중앙시장에는 17일 아침부터 제수용품과 생선 등을 구입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나 정작 시장 상인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예년만 못해 침울한 분위기다.(아시아뉴스통신=은윤수 기자)

 2일과 7일의 경주 닷새장터는 오전 5시면 미명속에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경주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성동·중앙 재래시장. 설 대목을 일주일 앞두고 찾은 재래시장엔 수십 년 거슬러 오른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날 분위기는 경주역 앞 성동시장 사거리가 가장 뜨거웠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이곳에서 좋은 목을 잡고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상인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었다. 닷새마다 열리기 때문에 이날이 사실상 올 설의 대목장이었다.


 촌로들이 대부분인 상인들의 소쿠리에는 지난 가을 볕 좋은 날을 골라 말렸음직한 고사리며 도라지, 표고버섯 등 각종 제수용 나물들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다. 아직은 때깔을 잃지 않은 대추와 밤, 촌로들의 손때 뭍은 곶감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조반을 뜨는 둥 마는 둥 나섰겠지만 매상은 썩 신통치 않아 보인다.


 대목장엔 역시 생선이다. 시내권이라 그런지 어물전 앞은 아침부터 북새통이다. 조금이라도 통통한 놈을 고르는 손길, 머리도 버리지 말고 넣어 달라는 주문, 지난해보다 값이 올랐다는 푸념에도 생선가게 주인의 칼자루엔 힘이 넘친다.


 '수입조기 아니냐'며 흥정을 시작한 한 할머니는 주인의 눈흘김이 오기 전 발길을 돌렸다. 수 십리 먼길을 달려 왔을 동태와 갈치, 제법 값나갈 듯한 상어는 대목장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귀한 손님이다.


 명절분위기는 튀밥집이 살려준다. 뻥소리 한 방에 세상을 동심으로 안내하는 튀밥집엔 모진 세월을 이겨냈을 할머니들이 손주녀석 만날 설레임에 피곤한줄 모르고 줄을 서 있다.


 골목 안 그릇집과 공구가게도 대목장에 끼어들 태세다. 큰 손님을 맞아야하는 옹색한 농가들이 이날을 택해 접시며 사발, 냄비 등을 사가기도 하고 부지런한 농민들은 벌써부터 농기계 수리에 나섰기 때문이다.


 17일이 마지막 설 대목장이라 그런지 더 더욱 활기가 넘친다. 설 대목장 핑계로 길게는 1년 짧게는 몇 달만에 만나는 사람과 사람들, 무엇에 이끌리 듯 하나 둘 모여드는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 손자의 손을 잡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할머니, 물건을 흥정하는 아저씨와 주부들, 이 모두가 오늘 설 대목장터의 주인공들이다.


 40대 초반 이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던 추억의 현장, 열매시장(성동시장), 아랫시장(중앙시장) 장터. 이곳에 서면 어린시절 눈깔사탕 얻어먹을 요량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나섰던 그때의 장날 추억이 다시금 새로워진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도 사라지고 약장수의 구성진 노래가락도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우리가 늘상 듣고 맡아 온 진솔한 삶의 소리와 순박한 사람들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난다.


 점심때 쯤이면 국밥집과 자장면 배달부가 바빠질 판이다. 장터사거리 중국집 굴뚝에서는 오전부터 짜장 볶는 냄새가 진동하고 국밥집 주방은 연이어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다. 왕년에 살림깨나 부셔 먹었을 박씨 할아버지도 점심 후 다방에 들러 마담을 찾을 심산이다. 그는 며칠 전부터 할머니 몰래 중절모의 먼지를 털어 놓았단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서민들의 설 대목장터는 인정이 넘친다.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에서 오신 박모(73) 할머니는 나물이라도 팔아 손자세끼 신발하나 사러 나왔다며 이것저것 신발짝을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외지상혼은 파리를 날리고 있다. 대목에 맞춰 경주까지 달려왔지만 장 분위기에 들러리를 섰을 뿐이다.


 유명메이커 신발 한켤레에 1만원, 누비솜 바지 한장에 5000원을 붙여 놔도 눈길 주는 이 별로 없고 천원짜리 몇장에 예술품을 판다는 서양란장사 또한 오전 내 헛심을 쓰고 있다.


 디지털 백화점도 개점휴업 상태다. 개조한 1톤 중고트럭에 각종 CD와 DVD, 선글라스 등을 전시해 놨지만 허기진 농민들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모양이다.


 "팔려서 한잔, 안 팔려서 한잔."
오전에 넘어서면서 왁자지껄 했던 대목장 분위기의 위세도 한풀 꺽인다. 감포식당, 양북식당을 비롯해 중앙시장의 식당들은 하나, 둘 사람들로 붐빈다. '싸구려 싸구려'를 외쳐대던 옷전 아저씨가 상기된 얼굴로 들어서며 막걸리를 청하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에이 참, 안 팔려도 이렇게 안 팔려서야..., 이번 설 대목장은 다 틀렸네 그려." 막걸리 두잔을 연거푸 마신 아저씨는 다시 옷전을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손을 잡고 들어선 두 할머니는 이고 온 나물거리를 "일찌감치 떨이했다"며 기분 좋아 한잔 한다.


 살속을 파고드는 추위, 요란한 뽕짝박자 속에서도 졸고 있는 상인의 고단함 뒤로 경주 재래시장 장날의 섣달 짧은 해가 기울고 있었다.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